이순신 장군 알아보기
이순신 장군은 개풍현 덕수리를 본관으로 하는 중시조 이돈수의 12대손이다 13대손은 율곡 이이이다 지금의 개성군이 본관이다 이돈수는 고려말 무신으로 중급 무신관리였다 현조부인 5대조 이변은 세종때 과거 급제하여 중국말을 잘하여 사신으로 중국에 다녀오고 통번역원에서 근무하다가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때까지 조정에서 일하다가 82세에 돌아가셨는데 성격이 강직하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힘들게 했다고 전해진다 아마 당시의 사절단이 그러했듯이 개인 노비를 데리고 북경에 갔을것이며 당연히 무역할 물품도 오고갔을 것이다 잦은 중국의 왕래 결과 상당한 부를 축적했을것으로 예상된다 당상관 이상의 벼슬인 판서와 여섯임금을 모신 노련한 신하가 외교전문가이면 당연한 일일수도 있다
증조부인 이거는 성종 연산군때 사람이다 연산군이 세자일때 스승이었는데 연산이 좋아하지는 않았다 연산때 순천부사를 지냈다 실록에는 젊을때는 강직하고 청렴했으나 나이들어서는 청렴하지 못했다라고 한다 당시의 지방 수령은 봉급이 없고 세금을 거두어 국가에 일정부분 납부하고 남는 것을 자기의 급여로 하였다 산골의 수령보다 곡창지대의 수령을 선호하는 이유이기도 하였다 순천은 곡창지대였으니 당시 재산을 불렸으리라 짐작된다
조부 이백록은 성균관 유생대표였다가 중종시절 조광조가 실각한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과거시험을 볼수 없는 처벌을 받게된다 음서로 시장을 관리하는 말단 벼슬을 하는데 그쳤다 오히려 장군의 부친인 이정의 혼례를 중종의 상중인 국상에 치루었다고 곤장을 맞아 사망하였다 후일 아버지 이정이 상소하여 조부가 혼례는 하였지만 술과 고기를 먹지 않았다하여 과거를 볼수 있는 길이 열렸다
부친 이정은 벼슬을 하지 않았다 초계변씨는 덕수이씨와 상당히 가깝다 현조인 이변과 같이 근무한 초계변씨와 친하여 혼인으로 맺어진 집안이다 이변이후 초계변씨와의 혼인은 여러번이다 장군의 형제는 4남이다 중국 고대 삼황오제 이후 명군인 복희 요순우를 이름으로 하였다 첫째가 희신 둘째가 요신 셋째가 순신 막내가 우신이다 장군은 지금의 명보극장 옆 골목안이 생가터인 건천동에서 1545년 3월에 나셨다 남산아래 장마때만 냇물이 흐르는 건천동은 32호 정도의 작은 마을이다 허균의 기록에 의하면 병마절도사의 아들인 원균도 건천동 출신이다 징비록을 쓰고 장군과 뗄수없는 유성룡은 작은형 요신의 친구였다
훈련원에서 그리멀지 않아 그랬는지 몰라도 어린시절 군사놀이를 하면 늘 대장역을 하였다 어른들도 진지를 그냥 지나가면 활로 위협하였다 참외밭 서리하다가 주인에게 혼이 난 장군이 집에서 타던 말을 타고와 참외밭을 뛰어다녔다는 야사도 있다 집에 말이 있다는것으로 보아 상당한 재산을 가진 금수저 출신이라 할수 있다 청소년기 즈음 외가가 있는 아산으로 이사를 간것으로 생각된다 부인 방씨는 보성현감을 지낸 방진의 무남독녀 외딸로 회 열 면 3남과 딸 하나를 두었고 첩과의 사이에 두아들을 두었다
형들을 따라 문과 공부를 하다가 21세에 장가를 갔고 그 이듬해인 22세부터 무과를 준비하였는데 아마도 무과출신인 장인의 영향을 받은듯하다 28세때 별시 무과에서 말을 타다 넘어져 다리를 다쳐 낙방한 얘기는 예전 교과서에도 나왔다 32세때 식년시에 무과에서 병과 4등으로 급제하였다 28명을 뽑는 무과에서 갑과 3명 을과 5명 병과 4등이니 전체 12등으로 합격하였다 당시에는 29명을 뽑았고 그중 현역군인이 25명이고 민간인은 4명뿐이니 상당한 실력이었다 또 급제자 평균 나이가 34세이니 늦은 나이도 아니었다 장군의 과거 급제에 기뻐하신 모친이 재산을 상속하였는데 모친 변씨의 개인 노비만 21명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어마어마한 부자였다 1546년 1월에 급제하였고 권관으로 발령받는건 그해 12월이었다 드디어 장군의 길로 들어섰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