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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주의 이순신

강동준 2024. 8. 18. 13:01

수영은 5군데 있으며 임금이 있는 한양에서 보아 경상좌수영은 동래  경상우수영은 거제 전라좌수영은 여수 전라우수영은 해남 충청수영은 보령에 본진이 있다 규모를 비교하면 경상좌수영은 18관 16포를 관장하며 판옥선은 75척에 1만명의 병사가 있었고 경상우수영은 8관 16포 판옥선 75척 병사는 1.2만명이 있고 전라좌수영은 5관 5포 판옥선 25척 병사는 4천이었고 전라우수영은 12관 15포 판옥선 30척 병사는 5천명이었다 관은 고을의 숫자를 말하고 포는 수군부대를 말한다 만호나 첨사가 그 포의 책임자인것이다 후일 삼도수군통제영은 한산도에 설치하였으며 통영은 통제영의 준말이다

당시의 수군은 고려이후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왜적 맞춤전력으로 배도 발전하였고 전술도 변화 발전하였다 16세기 중반의 삼포 사량진 을묘왜변을 통해 수군의 전술이 왜구 마춤으로 발전하였다 근본적으로 조선수군은 침략이 아니라 방어에 중점을 두었고 육지 가까이 근해를 왕래하였다 반면에 왜적은 먼바다를 가야했고  조선은 물론 명이나 대만 동남아까지 다니면서 물건을 약탈하는 전략을 취하였다
따라서 조선수군은 어디로 올지 모르니 해안가 여러곳에 포를 설치하여 가장 가까운 포에서 지역방어를 하였고 숫자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 배가 컸으며 왜구의 전술인 등선육박전을 피하기 위해 근접전보다 멀리서 함포를 쏘고 활로 상대를 제압하거나 배를 침몰시키는 전략을 썼다 따라서 판옥선은 배가 20미터로 크고 4미터가 넘는 높이로 올라오기 힘들게 만들었다 근해를 다니고 조수간만의 차가 심해 갯벌이 있어 바닥은 편평하게 만들고 소나무 참나무 등으로 나무못을 사용하여 튼튼하게 만들었다

반면 왜선은 먼바다를 항해하여 상대의 물건이나 식량 사람 등을 약탈하고 생포하여 되돌아 와야 했기에 배는 빠르고 공격할때 상대배를 침몰시키거나 파괴하지 않는 전술을 찾다보니 배를 가까이에 붙여 상대배에 올라가 제압을 할려니 함포보다는 칼로 싸우는 전술을 가지고 있었다 왜군의 배는 장거리 항해에 유리한 바닥이 뾰족한 첨저선이었고 삼나무로 만들어 가벼웠으며 쇠못을 사용하여 많은 배를 빨리 만들수 있었다
권투로 치면 조선은 아웃복서이고 왜적은 인파이터인데 이 차이를 잘 이해해야 조선수군을 알수 있으며 무기체계와 병법이나 전술을 이해할수 있다

조선의 함포는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 황자총통 별자총통 등이 있으며 장군전이란 대형 포나 산탄총격인 조란탄 연발총격인 신기전 수류탄격인 비격진천뢰등의 무기나 탄약이 있었다 사거리도 최소 200보에서 1500보가 넘었다 300미터가 넘는 거리에서 전투가 시작되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왜적은 함포가 있기는 하지만 반동때문에 배가 흔들려 대형함포는 없고 소형함포도 돛에 매달아 허공에 띄운 상태라 명중률도 형편없어 활용가치가 낮았다 사거리 80미터 유효사거리 50미터인 조총과 활이 전부였다

전라좌수사로 임명된 장군은 관내인 보성 낙안 순천 광양 흥양(고흥)과 5포를 순시하고 점검하였다 태종때 귀선을 시험했다는 기록이 있는것으로 보아 첫 발명은 아니지만 귀선 3척을 왜군의 전술에 맞게 건조하여 덮개를 씌우고 쇠못을 박아 오를수 없게 하였으며 옆면 뿐만 아니라 앞과 뒤에도 포를 배치하여 적 한가운데서 활약하는 돌격선을 만들었다 여수본영에 1척 방답에 1척 순천에 1척을 배치하였다 또 장군은 전선을 정비점검하고 추가 건조하고 두개조로 나누어 2개월씩 근무하는 상번 하번과 예비군인 별방군을 소집점검하고 장부 인원과 실제 인원을 점검하였다 각종 무기를 점검하고 수리하면서 보충하였다 화약을 만드는  기술인력도 확충하고 탄약의  재고파악과 보충도 하였으리라 성곽의 상태 해자도 살펴보고 병사들의 훈련상태와 기강도 점검하였다 또 정기적으로 활쏘기 대회를 열어 우수자는 포상을 하였다 장군은 약 80퍼센트 정도의 명중률을 자랑하였다 정조는 1발을 일부러 쏘지 않아 여지를 남겨둔 것에 비하지는 못하지만 상당한 실력이다 부하들과도 소통하여 애로사항을 듣고 의견을 청취하고 전략전술 항해술 등의 도움을 받았다 조방장 정걸과 바다가이드 어영담에게도 많은 자문을 얻었다 군량미 확보를 위해 둔전을 운영하는건 기본이고 청어를 잡아 시장에 팔기도 하고 휴전중에는 소금을 만들어 팔았으며 목화도 재배하는등 둔전운영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입대를 하면 제일 먼저 배우는게 제식훈련이다 조선수군의 제식은 배를 내몸처럼 다룰수 있게 훈련해야 하는데 호수가 아닌 물살과 조류 바람이 있는 상황에서 일자형의 종대 횡대로 배를 내맘처럼  움직이기까지 많은 훈련이 있었을 것이고 북의 장단이나 깃발의 색깔 깃발수 등으로 수신호를 통해 진법을 펼쳐야 하는 수군의 훈련은 참으로 어렵고도 힘들었으리라 함포도 흔들리는 배에서 거리와 높이를 맞추어 명중시키는 훈련도 얼마나 어려웠을까 짐작된다

난중일기란 말은 후일 정조대왕이 장군의 관련 기록을 총정리하여 붙인 이름이고 장군은 당해년도를 붙인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첫날 일기가 임진일기 1월 1일자이다 날자와 더불어 반드시 날씨를 기록하였는데 수군의 특성을 감안했으리라 이날 일기는 모친에 대한 걱정과 조카를 비롯한 가족들의 문안인사 그리고 화살인 장편전을 논의하였다 장전은 우리가 아는 긴 화살이다 편전을 쏠려면 활에 장치를 해야한다 활을 쏘는 방향으로 U자형 관을 달아 화살의 길을 만들어 주면 약 30센티에 불과한 작은 화살을 쏠수 있다 이 편전은 통아라는 화살길이 있어 속도는 물론 파괴력도 더 좋았으며 더 많은 화살을 만들수 있고 적군은 편전을 쏠수 없으나 적군의 화살을 주워 다시 쏠수도 있어 장점이 많은 활이다 새해 첫날 행한 일이다 2월에는 귀선의 돛을 납품받았고 4월 12일에는 귀선에서 지자 현자총통으로 함포사격 훈련을 하였다 이튿날인 13일 왜군은 절영도에 왔다
백성을 사랑한 장군의 에피소드가 재미있다 채석장에서 돌을 캐는 석공이 시끄러우니 동네 개들이 짖었는데 석공이 화가 나서 개들을 잡아 먹었는데 장군이 석공을 붙잡아 곤장 80대의 벌을 내렸다 진정한 애견인일지도 모른다

이제 전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