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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선의 첫출전

강동준 2024. 8. 25. 14:55

1차 해전후 토요토미는 1 조선왕 선조를 생포할것 2 군량은 전라도에서 직접 조달할것 3 남해안 일대에 조속히 성을 구축할것 4 조선 수군을 찾아 섬멸할것 5 남해를 돌아 서해의 보급로를 확보할것 등의 대책을 지시하였다
귀선은 한자로 부르는 명칭이고 순한글은 거북배이고 거북선은 일제시대때 붙여진 이름이다 또 귀선이 철갑선이냐 쇠못을 박은 목선인가도 쟁점이나 대부분 목선으로 인식한다 귀선이 2층구조인가 3층인가를 두고도 의견이 갈리기도 하는데 3층이 아니고 2층이라 여겨진다 첫째는 판옥선에 지붕을 얹은 초기 형태이다 둘째는 조타수가 배의 제일 뒤편에서 신호를 하거나 받을때 2층과 3층 양쪽에서 받기 어려운 점이다 마지막으로 격렬한 노꾼의 운동량과 노하나에 4~5명이 젓는 형태에서는 낮은 천정은 배의 속도에 영향을 주기에 층고가 높아야함으로 낮은 층수가 맞을듯 하다

2차 출정을 6월 3일에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함께 하기로 하였는데 원균이 사천에 왜군이 나타났다는 전언으로 5월 29일 급하게 출정하였다 여수본영에 판옥선과 귀선을 배치하여 기습에 대비하였다  노량(남해대교 근처)에서 원균의 판옥선 3척과 연합하여 26척으로 사천에서 왜성을 쌓던 왜군을 유인하였으나 따라나오지 않아 밀물때 귀선을 앞세워 돌격하여 13척을 격침하였다 이 전투에서 두척의 귀선이 첫출전을 하였다 귀선의 대장은 돌격장으로 장계에 보고하였다 충파하여 배를 부수는 전술이 아니라 학익진 일자형 어린진 첨자형 장사진형 등 여러가지 진법을 파훼시키는 돌격형 전술 운용에 적합하게 근접하여 곡사포가 아닌 직사포를 쏘고 적군의 우두머리에 가깝게 접근하여 지휘를 방해하는 전술을 썼다고 예상되며 조총이나 화살등의 공격에 피해를 방지하고자 배의 두께도 판옥선보다 더 두꺼웠으리라
이 전투에서 장군도 왼쪽 어깨에 총상을 입어 오랫동안 고생하셨다 1년이 지나서도 진물이 흘러 뽕나무재와 바닷물로 씻어도 낫지 않는다는 기록도 있다

1차 출정때와는 달리 2차출정때는 육지에 내려 숙영을 했다 사량도에서 숙영후 6월 2일 거제도 당포에서 적선 21척을 격침하였고 3일은 왜군을 수색하였다 4일 전라우수사 이억기의 판옥선 25척과 합류하여 51척의 함대를 이루었다 5일 1차 당항포 전투에서 적선 25척을 격침하고 1척을 남겨두었다가 다음날 새벽 무의공 이순신으로 하여금 도망가는 적선 1척을 격침시켰다 이때 원균이 나타나 적의 수급을 무수히 많이 베었다 2차 출정때는 원균의 수급이 장군의 수급보다 더 많았다 당시 수급에 걸린 보상금이 현시세로 하면 수급하나에 1천만원이 넘는 정도라 한다 다음날인 7일 도망가는 적선 7척을 격침하고 나포하니 이게 율포전투이다 이후에 가덕도를 비롯한 다대포까지 수색을 하였으나 적선이 보이지 않아 남해 미조항에서 연합함대를 해산하고 여수로 복귀하였다

장군의 전투방식은 현대전에서도 배워야할 만큼 교과서적이다 전투전 병사의 훈련 사기를 북돋는 한편 무기와 배를 점검하고 화약과 화살등 군수물자와 물과 식량등 군수품을 넉넉히 준비하고 절대로 무리하지 않았다 부하장수들과의 원할한 소통은 물론이고 척후선이나 포로였던 사람들의 정보와 날씨나 조류의 방향 물때 등의 환경조건도 철저하게 조사하고 파악하여 전투에 임하였다
전투에 임해서는 적의 기습이나 배후침투에 대비하여 반드시 후방에 배치를 하였으며 협선이나 포작선을 미리 보내 정탐을 하였고 암초가 있는지 해안이 가까워 왜적이 헤엄쳐 달아나 백성들을 약탈할수 있는지 물때가 맞는지 등을 고려 심사숙고하여 전투를 시작하였다 사천과 당항포에서는 적선 1~2척을 남겨두고 후퇴하여 약탈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사주경계는 물론이고 적에게 잡힌 조선인포로들의 구출을 중요시 하였다 현대전도 정보의 수집 분석을 통해 아군이 유리한 지형과 전술을 통해 적을 제압하는 것이 정석이다

하루에 두편은 무리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