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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 최초의 상륙작전

강동준 2024. 9. 6. 16:56

9월 1일 부산대첩이후 추수기에 접어든 호남은 조선 전체 군량미를 생산하는 거점지역이다 또 겨울은 북풍이 부는 계절이라 해안가에도 파도가 높다 층고가 높은 판옥선은 바람과 파도에 특히 취약하여 겨울철은 전투도 쉬는 계절이다
장군은 93년 1월 훈련원 주보 이봉수가 염초 굽는 법을 터득하여 쉽게 화약을 만들수 있게 되어 1천근의 화약을 만들었다 목숨이 안전한 곳이라고 생각하고 전라좌수영으로 찾아온 피난민 200여가구의 백성들을 돌산도로 보내었다 돌산도는 말을 기르는 국가시설인데 전쟁의 위험에서 안전한 돌산도에 정착해 자급자족하도록 도와주었다 25척이었던 판옥선도 증선하고 수군과 노꾼도 확충하였다

93년 1월에 명나라 군대가 평양성을 회복하고 밀고 내려가니 선조는 후퇴하는 왜군이 일본으로 도망가지 못하도록 부산을 공격하라는 출격 명령을 3번이나 하였다
장군은 2월 6일 여수를 40척의 판옥선으로 출발하여 7일 견내량에서 원균의 판옥선 7척과 합류하였고 8일 이억기의 전라우수영 판옥선 42척과 합류하니 약90척에 이르는 대함대였다 한산대첩때의 60척과 비교하면 엄청난 대함대이다 대함대는 칠천량근처에서 숙영하였다 한편 왜군은 부산을 방어하기 위해 진해 안골포와 웅포에 왜성을 쌓아 전진기지로 삼았다
부산을 공격하기 위해 웅포를 지나치고 가면 부산포 공격시 배후에 웅포의 왜군에 포위되는 양상이라 웅포의 왜군을 격파할수 밖에 없다
웅포전투는 총7차례 치루어졌으며 기간은 한달이 넘는 동안 이루어 졌다 안골포 맞은편인 웅포 입구 육지에 왜성을 쌓아 공격하고 안쪽 웅포에서도 반격하였다 1차전투는 2월 10일 정박된 웅포의 왜선을 유인하였으나 토요토미의 조선수군과의 전투금지령에 따라 왜군은 따라 나오지 않았다 소진포로 후퇴하여 숙영하였다
2차전투는 12일에 웅포입구 육지에서의 공격을 뚫고 웅포로 진입하여 유인하였으나 따라 나오지 않아 칠천도로 나와 숙영하였다
웅포만 공격하는 방법으로는 왜군이 꼼짝하지 않아 장군은 경상도 병사 김성일에 장계를 보내 웅포에 웅크린 왜군이 나오지 않으니 육군이 공격하면 웅포의 왜군이 바다로 나오면 섬멸하겠다는 보고를 하였다
3차전은 18일 육지공격을 뚫고 웅포에서 적을 유인하니 적의 젊은 장수가 10척을 끌고나와 싸워서 5척을 격침시키니 나머지는 웅포로 도망가버렸다 웅포를 나와 사화랑에서 숙영하였다
경상병사 김성일의 답신이 도착했는데 곽재우 등으로 하여금 창원을 먼저 공격하고 차츰 진해까지 공격하겠다는 전갈이었다 하세월이다
20일 웅포로 진군하였으나 기상이상으로 파도가 높고 바람이 불어 퇴각하였다

22일 의승병장인 심혜, 의승과 함께 5차 출전을 하였다 제포방향으로 600여명이 상륙하여 공격하고 안골포방향으로 1100여명이 상륙하여 공격, 수군은 웅포로 직접 공격하는 수륙합동작전을 전개하여 성과를 얻었으나 성을 빼앗거나 함락하지는 못했다 전라우수영 가리포 배 1척과 전라좌수영 발포 배 1척이 공을 세우고자 명령없이 싸우다가 적에게 나포될 위기에 처했는데 원균이 보고도 구출하지 않아 거북선으로 하여금 구하였다 난중일기에서 장군은 분하고 분하며 원통하다고 하셨다
28일에도 가덕도에서 출격하였으나 기상악화로 철수하여 소진포에서 숙영하였다
3월 6일에도 웅포를 공격하고 산중턱의 왜군을 공격하고 유인하였으나 왜군은 더욱 소극적으로 육지에 웅크리고 숨어서 포를 쏘는 반격만 할 뿐이었다
조선수군은 한산도로 후퇴하였다  
약 두달간의 전투로 병사들의 피로가 극에 달하였고 화약을 비롯한 무기들도 부족하고 군량미도 떨어지고 명나라 군대는 벽제관 전투에서 패배하여 평양성으로 복귀하여 왜군을 더이상 공격하지 못하였다 거기에 더해 모내기철인 파종시기와 맞물려 교대로 농사짓게 하였지만 장정들은 전쟁에 징발되고 어린이와 부녀자 노인들은 군량운반 무기등을 보급하느라 일할 남은 일군이 없었다 그리하여 어쩔수 없이 4월 3일 회군하여 연합함대를 해체하였다
장군의 장계에는 기록이 없지만 후일 일본의 자료를 보면 51척의 배가 파손되었고 약 2000명의 전사자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웅포의 적장이 한산도에서 대패한 와키자카 야스하루였다 와키자카는 리벤지를 할수도 있었지만 겁에 질리고 기가 죽어 웅포에서 숨죽여 숨어 있었고 젊은 부하장수가 호기롭게 출전하였다가 전사하는것을 직접 목격하였다

93년 4월 5월 6월에는 남해안 일대를 순찰하고 왜적의 행태를 감시하는 순찰 출전을 하였다
93년 7월 14일에 전라좌수영을 한산도로 본영을 옮겼다 8월 1일에 종2품인 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되었다
94년부터 전염병이 남해안 일대에 유행하였다  1월에 장군도 전염병을 앓아 20일간 누워 일어나지 못하고 죽을 고비를 넘겼다
94년 4월 장계에 의하면 전체 수군 18500여명중 사망자 1905명, 감염자 3759명이었으며 95년도 임진장초에 따르면 삼도수군 21500명중 남은 병력이 불과 4109명뿐이었다고 보고한다 수군의 특성상 좁은 공간에 다수가 오랫동안 있어 전염이 급속히 전파되었다고 하겠다 92년도 임진년의 모든 전투에서 사망한 숫자가 불과 250여명인 점에 비추어 볼때 장군의 안타까움을 충분히 이해할수 있다 이때의 전염병으로 광양현감 어영담도 후일 사망하였다

94년 3월 4일 삼도연합수군이 당항포에서 싸운 전투이다 전라좌수영 10척, 우수영 10척, 경상 우수영 10척  어영담 이 30척을 이끌고 거제 근처에서 피해다니다가 당항포로 도망간 왜군 31척을 격침한 전투를 제2당항포 전투라 한다
이때 명과 왜군이 휴전협상을 벌이고 있었는데 명나라의 담종인이 왜와 협상 중이니 왜군을 공격하지 말라는 금토패문을 장군께 보내어 왔다 이에 장군은 답장에서 진해, 고성등 남해안에서 집을 불태우고 백성을 죽이거나 사로잡고 기와를 가져가고 대나무를 베어 일본에 싣고 가는데 왜군의 화의는 거짓말이다 대인의 뜻을 어기기 어려우므로 임금님께 죽음을 무릅쓰고 올린다고 아뢸것입니다
이로인해 더이상 전투를 못하고 회군하였다

94년 9월 29일 장문포 전투는 원균의 건의와 윤두서가 지시한 전투로 장군은 조정의 명령대로 움직인 싸움이다 거제도 장문포를 의병장인 김덕령과 곽재우로 하여금 800여명의 의병과 권율장군의 지휘하에 싸운 수륙합동전투이다 공격하는 군사보다 방어하는 왜군의 숫자가 더 많은 이상한 공격이었다 수군은 전염병의 여파로 전선운용이 어려울 만큼 병사도 부족했으며 훈련도 숙련되지 않은 병사들이었다 장문포를 공격했으나 왜군은 육지에서 항전할 뿐이었다 10월 1일에는 거제 영등포를 공격하여 적선 2척을 격침하였다 2일과 3일에는 장문포에서 해상전을 하였으나 왜군은 육지에서 방어만 하였다 4일에는 상륙작전을 펼쳐 수륙양공작전을 했지만 왜군은 성안에서 공성만 할 뿐이었다 5일은 칠천도에서 휴식하고 6일은 장문포를 공격했지만 왜군은 화친중임으로 싸울수 없다는 패문만 성앞에 꽂아두고는 응전하지도 않았다 어쩔수 없이 한산도로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 장문포 전투는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당시 명나라가 왜군에게 요청한 화친의 조건은 왜군은 조선에서 완전히 퇴각할것, 조선의 왕자인 임해군, 순화군을 송환할것, 토요토미가 조선침략에 대해 공식 사과할것 등이었고
왜적의 요구조건은 명나라의 황녀를 천황의 후궁으로 보낼것, 조선의 하4도를 왜에게 이양할것, 조선의 중신이 일본에 영원히 항복할것, 조선의 왕자와 대신을 일본에 볼모로 보낼것, 명과 왜의 무역을 재개할것 등이다

양측이 모두 말도 안되는 조건인것을 서로 알면서 심유경과 고니시 유키나가는 시간만 끌고 있었고 명의 황제나 토요토미는 당시에는 상대의 조건에 대해 전혀 몰랐다 후일 정유재란 즈음에는 이같은 사실을 양쪽에서 모두 알았다 해안이 고향이었던 심유경은 사형에 처해졌고 토요토미의 1군 대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처형을 면하고 정유재란에도 참여하였지만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에 패배한후 할복을 명받았으나 천주교 신자임을 이유로 거절하여 결국 처형되었다
93년 전투는 웅포뿐이고 94년의 전투는  제2당항포 전투와 윤두서의 장문포 전투뿐이었다 긴 휴전 회담만이 지루하게 계속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