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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 이야기 보따리2

강동준 2025. 1. 28. 22:41

돈의문터를 지나 정동길로 접어들고 이화여고를 지나면 중앙일보가 있고 곧 서소문터가 있다 서소문은 소의문이라 불렸고 원래 이름은 소덕문이었으나 영조때 개축하면서 소의문으로 바뀌었다 서소문은 광희문과 함께 한양도성에서 상여가 나가는 시구문이었다 또 대원군 시기 천주교 박해가 있던 때에는 서소문 밖 네거리는 처형장이었다 정확한 위치는 모르지만 슬픈 역사의 현장이다 이곳에서 순교한 사람들을 위해 인근 충정로에는 약현성당이 있다 약현성당은 명동성당보다 먼저 건립된 조선 최초의 성당이다 순교자들을 위한 성당때문인지 엄숙한 분위기가 흘러 넘친다

숭례문을 지나 남산을 오르다보면 김구선생 광장이 있다 이곳은 일제 시대 신사가 있던 자리로 알려졌다 광장 옆에는 한양성곽의 기초부터 쌓는 과정을 보여주는 야외성곽 박물관의 역할을 한다 남산정상을 지나 내려가면 성곽이 아기자기한 면모가 보여 심심치 않게 해준다
장충동 공원은 민비가 시해당한 을미사변때 순직한 이경직을 비롯한 사람들을 위한 일종의 국립현충원이었으나 일본의 초대통감인 이등박문을 기념하기 위한 박문사 사당으로 변형되었으며 박문사의 입구에는 경희궁의 정문인 인화문을 이건하여 세웠고 후일 신라호텔의 정문으로도 사용되었다 현재는 인화문은 경희궁의 정문으로 제자리를 찾아갔으며 신라호텔에는 인화문을 모방한 문이 있다
또 배호가 불러 히트한 노래 안개낀 장충단공원의 가사는 일제 당시 장충단 공원옆에 유곽을 만들어 사연많은 이야기를 노래로 푼것이라고 한다

광희문은 소의문과 마찬가지로 도성안의 시신이 나가는 시구문이었다 이 문은 특히 인조와 관련이 많은데 이괄의 난 당시 피난나가던 인조가 급히 몸을 피하기 위해 나갔었고 병자호란때도 갑자기 들이닥친 청군을 피해 강화도로 가지 못하고 시구문을 통해 남한산성으로 도망간 문이었는데 대문으로 나가지 못하고 소문으로 그것도 시구문으로 도망가는 왕의 체면은 말이 아니었다

흥인지문을 지나 낙산에 이르면 제일 먼저 비운의 왕 단종이 떠오른다 왕세손 왕세자를 거쳐 왕위에 오른 단종이야말로 최고의 정통성을 지닌 군주였다 영월에서 노산군으로 죽고난후 단종비 송씨는 창의동에서 서인으로 염색을 업으로 삼고 82세까지 장수하였다 또 민비가 임오군란때  이천으로 피난가서 왕궁으로 복귀를 언제쯤 할수 있겠느냐고 무당에게 물었는데 100일이내에 복귀한다고 얘기하여 실제 60일만에 돌아와 그 무당을 불러 궁으로 들이니 그가 유명한 진령군이다 대원군이 10년간 모은 나랏돈을 1년만에 탕진한 민비의 사치와 낭비에 크게 일조한 무당이다 금강산 일만이천봉 봉우리마다 쌀한가마니를 바쳐 기도한 무당이다 결국 궁궐에서 쫓겨나 낙산언저리에서 살았었다

혜화문은 대학로 위쪽 높은 언덕에 있는데 전차가 다니기 위해 헐었는데 본래 자리보다 약간 위쪽에 복원되어 있다 혜화문의 천정 그림이 있는데 다른 문들의 천정그림에는 용의 그림이 있지만 혜화문의 천정그림은 봉황이 있다 이는 혜화문 바깥의 넓은 들판에 곡식을 축내는 참새를 쫓기 위하서라는 얘기가 있는데 참새와 봉황은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이다
또 혜화문 바로 옆에는 옛 서울시장 관사가 있다 성벽에 붙어있는 집이다 지금은 박물관의 역할을 하고 있다 박원순 전시장까지는 살았던 곳이다

낙산 주변의 커피솦에서 바라보는 일몰과 야경은 또다른 풍경이다 낙산을 지나 성북동을 오르면 저 멀리 백석을 사랑한 여인이 운영했던 대연각자리가 보인다 1천억원 짜리 대연각을 기부하여 길상사가 되었고 법정스님이 무소유로 잘 알려진 절이다
만해 한용운이 살던 기녕관도 있으며 조선골동품을 지키는데 전재산을 쏟아부은 간송 전형필의 정신을 볼수 있는 간송박물관도 성북동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