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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의 이모저모

강동준 2025. 2. 5. 11:21

덕수궁은 수양대군인 세조가 큰아들인 의경세자가 요절하자 며느리인 한씨와 장손자인 월산대군과 후일 성종이 되는 자을산군을 위해 지어준 사저였다 세자인 아들이 죽고 둘째인 해양대군을 세자로 삼아 어쩔수 없이 궁을 떠나보내야 했던 부모의 심정이라 궁궐에 버금가게 잘 지어 내보낸 것이었다 이후 예종을 거쳐 의경세자의 둘째아들인 자을산군이 당시 권력자인 한명회의 사위였기에 세조의 왕후인 정희왕후와 한명회의 선택으로 성종으로  즉위하자 모친한씨는 대비가 되어 궁으로 가고 월산대군의 사저가 되었다

성종의 모친 한씨는 한확의 딸인데 한확은 조선초의 권력자였다 누이동생이 명황제의 후궁이었기 때문에 명나라를 사대한 조선에서는 그야말로 임금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대단한 권세가였다 수양대군이 며느리로 맞이할 만큼 대단한 집안이었다 한씨는 후일 인수대비로 불리웠는데 성종의 둘째비인 폐비 윤씨를 쫓아낸 장본인이다 이를 안 손자 연산군이 할머니인 인수대비에게 왜 어머니를 쫓아내고 죽였냐며 대들고 밀쳐서 죽은 불행한 여인이다

임란후 피난에서 돌아온 선조가 궁이 불타 없어져 임시로 거처하던 궁이었고 선조는 여기서 죽었다
광해군 시절에는 선조의 왕비인 인목대비가 이곳에 영창대군과 함께 유폐되어 살았다 후일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유배되어 방안에 갇혀 불을 때어 쪄 죽었고 인목대비는 덕수궁에 갇혀 살다가 인조반정을 인정해 달라는 요청에 광해군의 목을 가져오기 전에는 교지를 내릴수 없다고 하였다 광해의 뼈를 갈아마시고 살점을 씹어 먹어도 원한이 풀리지 않는다고 하여 인조가 설득하는데 애를 먹었다

고종때 아관파천이후 거주하였는데 정동일대 외국공사관들이 많아 일본의 간섭을 두려워한 고종이 당시 경운궁에 머물렀다 헤이그 밀사사건후 황제에서 퇴위한 고종을 위해 순종이 명칭을 덕수궁이라 개칭하여 지금까지 불리운다

지금은 없어진 남쪽의 인화문이 정문이었으나 동쪽문인 대안문이 정문으로 사용되고 있다 현재는 대한문인데 한양을 크게 세운다는 뜻이다 한양은 한수의 이북이라는 뜻인데 낙양은 낙수의 북쪽을 일컫는 말이다 즉 한양은 한수의 북쪽 양의 기운이 넘치는 땅이란 뜻이다

대한문은 현재 시청 광화문로 공사를 위해 뒤쪽으로 35미터 옮겼고 대한문 바로 앞에 환구단이 보인다 대한제국으로 황제국을 선포한 현장의 증거들이다

덕수궁 관내에는 석조전 분수대 등 현대적 건물들도 있는데 고종시기 축조된 서양식 건물이다 커피를 좋아한 고종이 커피테라스도 있는데 한식양식이 어우러진 건축물이다

고종이 60이 넘어 얻은 막내딸 덕혜옹주를 위해 설치한 최초의 유치원도 있으며 난간에서 떨어지는걸 방지하기 위한 안전바를 설치한 흔적이 남아있다

덕수궁의 현재 규모는 정상적인때의 규모보다는 훨씬 축소되어 있다 나라가 힘이 없으면 자기집도 빼앗기는게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