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모의 선물
신작로에서 언덕이랄것도 아닌 약간의 오르막을 동네사람들은 길건너 마을 이름을 붙여 독술고개라 불렀다 독술고개를 지나 산모퉁이를 돌면 70년대 새마을 운동으로 지어진 마을창고가 있다 창고옆에는 마을 느티나무가 있는데 대략 수명이 200년은 넘은듯 하다 느타나무 옆에는 둘레가 3백미터쯤 되는 인공저수지가 있는데 1930년대쯤 판 저수지라 한다 어린시절 이 저수지에는 물이 깨끗하여 민물새우도 잡았다 7살즈음 민물새우를 잡아 산에서 새우탕을 끓여 먹던 둘째 삼촌을 따라가서 막걸리 한모금을 얻어먹고 비틀거렸는데 삼촌은 할아버지께 혼이 난 것으로 기억한다 70년대 하이타이를 비롯한 세제를 쓰면서 저수지에는 더이상 새우가 살지 않았다 저수지 아래쪽은 넓지도 적지도 않은 동네밑 들판이 있다 들판 건너 산아래 마을은 우리 동네와 마주 앉은 오청개는 어모면 다남4리이다 20호가 채 안되는 작은 마을이다 우리 마을은 개령면에 속하지만 어모면과 경계에 있는 마을이다
저수지를 지나면 마을이 있는데 산아래 마을이다보니 약간 경사진 땅을 따라서 아래쪽은 낮고 마을 위쪽으로 갈수록 높은 지대이다 우리집은 마을회관을 지나 약간 위쪽에 있다 웃마 아랫마라 불렀는데 웃마이다
부모님이 결혼할 당시 막내고모는 학교도 입학하지 않은 꼬마였다 후일 김천여고를 졸업하고 대학 입학전까지 할머니가 계셨지만 모친이 실질적인 보호자 역할을 하였다 김천까지 학교를 다닐려면 새벽밥을 먹고 도시락을 싸서 이십리길을 걸어서 가야했는데 학생의 빠른걸음이라 해도 1시간 30분은 넘게 걸렸으리라 아마 새벽5시에 일어나서 6시전에 밥을 먹고 나섰을 고모도 고생이었고 그 뒷바라지를 한 모친도 고생이었음은 미루어 짐작된다
영남대 가정과를 졸업한 고모는 졸업작품으로 수놓은 병풍을 만들었다 8폭 병풍에 전국 8도 글자와 대표명승지를 직접 자수로 수놓은 작품이었다 이 병풍은 50년이 지난 지금도 집안의 제사나 명절때 사용하고 있다 아쉬운 것은 뒷면의 글씨가 직접 쓴 글씨가 아니라 인쇄된 글씨인게 아쉽다 하지만 수놓인 8도의 명승지가 있는 병풍은 돈주고 구할수 없는 소중한 것이다 이제 제사와 차례를 지내지 않지만 이 병풍을 다시 잘 표구하여 고이 보존할 생각이다
국민학교 4학년 겨울에 고모가 선물한 스케이트를 처음으로 신고 배웠다 속칭 시케토라는 썰매가 아닌 정식 가죽구두가 달린 스케이트를 신고 얼음위에서 놀수 있었다 스케이트를 신고 얼음판에서 넘어지지 않고 다닐 정도의 수준이 되는데 이틀 걸렸다 이틀동안 계속 넘어지고 엉덩방아 찧고 자빠지기를 수십번 무릎과 엉덩이에 멍이 들었을 정도로 열심히 연습하였다 그후에는 실력이 일취월장하여 직진하면서 양쪽으로 발바꾸기 후진하면서 양쪽으로 발바꾸기 다리 벌려 옆으로 가기 등 피겨스케이팅에서 하는 기본 동작들을 스피드스케이트를 신고서도 할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후 동네 애들이 거의 스케이트를 타던 시기에는 산에서 꺾은 나무로 만든 아이스하키 스틱을 가지고 나무토막이나 고무공을 가지고 아이스하키를 할 정도로 저수지에서 스케이트를 타고 놀았다 스케이트는 대학생이 되기전까지 겨울놀이중 최고였다
고모는 대학졸업후 국민출판사에서 근무하였다 그때 시골집으로 보내준 책이 세계위인전기 전집이었다 국민학생이었던 나는 책읽는 것을 좋아하여 집에 있던 책은 물론이고 동네에 있는 책은 거의 다 읽었다 어깨동무나 소년중앙등 어린이 잡지는 물론 주간경향 등 어른들 잡지도 가리지 않고 책이라면 모두 읽었다 마침 그때에 50권 되는 전집이 생겼으니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고선지 장군편과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기억이 난다 국사책에도 나오지 않는 위인인 고선지 장군은 당나라 시절 고구려 유민으로 장군이 지금의 투르크지역인 서역을 정벌하러 간 얘기이다 또 크리스마스 이브날 동네에 있던 교회에서 먹을 것을 준다는 말에 현혹되어 교회에 갔더니 간단한 쪽지 시험을 쳤었다 전집에 있던 예수 그리스도를 읽은 기억 덕분에 난 거의 만점에 가까웠는데 그날 상품을 주지 않고 성탄일날 교회에 나오면 준다는 말에 크리스마스날 교회에 갔었다 이게 내가 교회를 간 처음이자 마지막 기억이다
고모가 선물해준 위인전과 세계 명작들은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 국민학교때 학교에서 독후감을 쓰면 항상 상을 받았었고 학교대표로 김천 시내에서 열리는 독후감 대회에도 나갔었다 지금도 잘쓰지는 못하지만 글쓰기를 좋아하는 것도 고모가 선물한 책의 영항이 크다고 생각한다
막내 고모는 올케인 모친에게 아직도 언니라고 부르지 않고 형님이라 호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