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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기원

강동준 2025. 2. 24. 12:12

내가 졸업한 개령서부국민학교는 김천에서 선산으로 가다가 유한킴벌리 공장이 보이는 곳에서 좌회전하여 들어가면 신룡리에 위치한 학교이다 개령면의 서쪽 지역인 대광동 황계동 덕촌동 신룡동과 어모면의 다남1리와 4리의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이다 해방이후 개교하여 내가 졸업할때가 30회가 되지 않는 학교이며 한 학년이 두반인 전교생이 700명쯤 되었다 교가에 700건아라는 기억이 있다
당시 국민학교가 모두 그러하듯이 교실바닥에 초칠도 하고 거위도 키웠으며 송충이도 잡고 쥐꼬리도 숙제로 냈고 난로위에 도시락도 있고 도시락 혼분식 검사도 하는 시골의 평범한 학교였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5, 6학년을 학생도 바뀌지 않았고 담임 선생님도 그대로인 상태로 2년간을 지내게 되었다 우리 담임 선생님은 한재수 선생님이셨다 다른 반은 황시영 선생님이라 내게는 큰 다행이었다 한재수 선생님은 나를 특히 이뻐하셨다 교내에서 가끔 심부름을 시키시면 난 선생님의 자전거를 타고 다니기도 하였다 자전거를 타고나면 자전거 손잡이에 묻어있던 선생님의 체취가 내손에도 묻어 나왔다 담배냄새와 스킨 로션의 향기로운 냄새는 그 어떤 향수보다 좋은 냄새였다 그 냄새를 맡고자 자전거를 타고나면 난 언제나 손을 코에 대고 킁킁거렸다
왕년에 국가대표 아닌 사람이 없듯이 국민학교 시절 공부를 꽤나 잘했던 나는 5학년에는 재학생 대표로 졸업식에서 송사를 하였고 졸업하던 6학년때는 답사를 하였다 졸업때는 교육장상과 종류를 알수 없는 상들을 몇개나 받았다 옥편과 국어사전을 부상으로 주었는데 서너개는 받았다

6학년때 담임선생님은 부모님을 특별히 호출하여 공부를 아주 잘하니 시골에 있는 개령중학교를 보내지 말고 김천 시내 중학교를 보내어 큰물에서 공부할수 있게 하자며 전입을 권하셨다 국민학교를 졸업하면 황계동 덕촌동 신룡동과 어모면 다남4리는 개령중학교로 진학을 하고 대광동과 어모면 다남1리만 김천 시내로 진학하는 것이다 선생님은 나를 옆 마을인 어모면 다남1리로 전입을 권하신 것이다 그래서 일명 참나무골로 전입을 하고 그냥 우리집에서 학교를 다녔다 위장전입이 불안하신 선생님의 권유로 나는 실제로 전입한 집으로 혼자 이사를 하였다 노부부만 사는 집의 방한칸을 얻어서 살았다 비교적 유복한 우리집과 달리 그집에서 주는 반찬은 입에 맞지 않았다 겨우 먹을만한건 콩장인데 이마저도 딱딱하여 억지로 먹었다 한번은 꿩을 잡아서 볶음요리를 주셨는데 참으로 맛나게 먹어 지금도 기억이 난다 당시 참남골 아이들과 산넘어 학교를 다녔는데 한두달은 다녔다
김천시내 소재한 남중은 모두 5개인데 그중에서 나는 황금동에 있던 한일중학교에 배치가 되었다 예비소집날에 빈몸으로 갔더니 반 배치고사 시험을 친다고 하여 학교앞 문방구에서 급하게 연필을 사서 시험을 쳤었다 김천 시내 아이들은 배치고사 공부를 별도로 했다고 하는데 시골에서는 시험이 있는지도 몰랐으니 학업에 대한 관심도가 그만큼 차이가 컸다 나중에 알았지만 난 250명 입학생중에서 10등 정도였다 같은 시험의 개령중학교 1등보다는 평균이 약 10점 정도 더 높았었다

부모님께서는 졸업할 즈음에 선생님께 감사의 선물로 집에서 만든 돗자리를 선물하셨다고 들었다 선생님의 그 마음과 은혜에 비하면 너무나 초라한 선물이다 원칙과 준법을 가르키고 모범을 보여야 하는 선생님이 제자를 위해 위장전입을 권할 만큼 애정을 보였는데 정작 그 제자는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을 뿐만아니라 선생님의 교직인생 전체에서 그와 같은 애정과 열정을 내가 꺾어버린건 아닐까 하는 우려와 죄스런 마음을 평생 안고 살았다 후일 보좌관으로 일할 때는 교육청의 스승찾기 코너를 검색하여 어느 학교에서 근무하시는지 알고 있었고 몇번이나 연락을 드릴까 망설였다 하지만 실망하셨을 선생님께 너무나 죄송하여 차마 연락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18년도 국회의원 보궐선거가 있고 난후 이제 찾아뵙지 않으면 후회할것 같아 부모님, 집사람과 함께 만났다 선생님을 뵙고 눈물을 흘렸는데 그건 반가움의 눈물이 아니라 선생님의 교직인생에 조금이라도 누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죄스런 마음이 전부였다 50년에 가까운 시간은 선생님의 젊은 시절만 기억하는 내게 정년을 지난 선생님의 모습에서 젊은 옛모습을 찾기는 어려웠지만 평생 가슴을 짓누르던 위장전입을 권하던 선생님의 기대에 부응 못한 죄스럼과 한을 조금이라도 덜어낼수 있어 내게는 큰 위안이었다
나는 강단에서 강의를 하는 교직에 종사하길 꿈꾸고 원했는데 이것은 오로지 한재수 선생님의 영향이다 영향이 크다라고 말하면 안된다 오로지 선생님 때문이다 시간강사로 몇년 보냈지만 결국에는 선생이 되지 못하였다 선생님 위장전입은 아니었습니다 기대에 부응하지도 못했고 실망하셨겠지만 제 인생에는 언제나 별처럼 빛나는 분이셨습니다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고맙습니다
한 재 수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