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맛집 외가
도시와 농촌을 불문하고 어디에서 자랐든 누구에게나 외가집은 설레는 단어이고 추억맛집이다
나의 외가는 상주시 화동면이다 김천에서 어모를 지나 여남재를 넘어 옥산 청리를 거쳐 상주시내에서 다시 오십리를 가야하는 상주에서도 산골이다
이길이 아니면 추풍령을 지나 황간에서 모서 모동을 지나 화동으로 가는 길이다 화동을 지나면 화서이고 여긴 충북 보은 옥천과 맞닿은 오지이다 김천에서 황간까지 1시간 황간에서 화동까지 1시간여 비포장 도로로 털털거리는 버스를 타야 갈수 있는 먼곳이었다
화동장터에서 버스를 내려 상주방향으로 조금 걷다보면 화동국민학교 화동중학교를 지나고 신작로를 벗어나 왼쪽 오솔길로 가면 또랑둑길을 걷다가 다시 신작로를 만나 걸으면 길가에 말무덤이 있고 멀리 왼쪽산에는 탄광이 보인다 중간에 마을 한복판을 지나가는데 오른쪽에 있는 점빵을 지나면 넓은 밭이 있는 왼쪽은 이발소가 있다 마을을 지나 모퉁이를 두어번 돌고돌면 지금은 폐교하여 흔적도 없는 국민학교를 지나 걷다보면 사과밭이 나온다 사과밭 옆에 한뼘이나 됨직한 작은 도랑길이 직선으로 마을을 향해 뻗어 있다 그 도랑길 끝에는 청도김씨 문중재실이 있고 재실과 앞집의 담벼락 사이의 좁은 골목길을 걸으면 외가집이다 대문안 오른쪽에는 돼지우리가 있고 사랑방 불때는 곳에는 짚으로 엮은 닭집이 벽에 걸려 있으며 왼쪽 아랫채는 누에를 치는 잠실과 방이 있고 정면의 본채는 꽤나 보기 좋고 품위있는 묵직한 돌기와 지붕이 반기고 있다
4녀 1남 5남매의 맏이인 모친은 막내인 외삼촌이 어릴때는 누나인지도 몰랐다고 한다 외삼촌은 60년생이니 난 형처럼 따랐고 닮기도 하였고 또 잘놀아 주었다 손재주 좋은 외삼촌이 소나무로 직접 만들어준 연의 얼레는 김천에서는 구할수도 없고 살수도 없는 최고의 명품얼레였다 얼레는 자랑할 필요도 없었다 보는 애들 전부 탐냈기 때문이다
마을 한가운데를 지나는 개천 넘어 어느 집에서 본 디딜방아는 낯선 풍경이었고 외가집 골목 입구에 사시는 작은 외가집에서 놀다 밤늦게 지붕위의 올빼미의 부엉 울음소리와 달빛에 비친 모습은 어린 내게 공포 그 자체였다
건넌방에서 외할아버지 품에 안겨 동몽선습이라도 외우고 뜻이라도 설명하면 엄청나게 좋아하시면서 꼭 안아 주셨다 외할머니는 안방의 부엌쪽으로 있는 작은 벽장문을 열고 송화가루를 꿀로 개어서 만든 다식과자와 시루떡이나 절편을 찍어 먹게 홍시를 내어 주시면 얼마나 맛나는지 지금도 그 달콤함이 기억난다
김천보다 훨씬 추운 상주이니 아랫채 광에 있는 장독의 물김치는 꺼내 먹다보니 줄어든 만큼 켜켜이 쌓인 얼음과 살얼음으로 된 물김치의 시원함은 비단 얼음때문만이 아니었다 여름이면 잠실방에서 누에가 뽕잎 먹는 광경과 비오는 듯한 소리가 얼마나 신기하든지 한참을 서서 누에가 뽕잎을 먹는 모습을 구경하였다 어린 시절에는 앞집에 살던 철수와 동네 안쪽에 살던 진목이와 즐겁게 같이 어울려 놀만큼 나는 외가집에 익숙하게 지냈다
어린 내 눈에 비친 큰 이모는 엄청나게 예뻤다 그런 예쁜 이모 결혼식에 참석한 일도 기억이 나고 외가집 잔치에 참석한 큰이모부의 장난에 모두들 얼굴에 숯검정칠을 하여 찍은 사진은 아직도 남아 있다 외할머니와 의자매를 맺은 동네 할머니는 나를 친손주처럼 이뻐하셨는데 얼굴은 아직도 생각난다
고등학생시절 작은 외가집 한살 위의 외당숙인 승호와 함께 동네 다락논마다 있는 조그만 물웅덩이를 바게쓰로 물을 퍼내고 잡은 겨울 미꾸라지를 아주 맛나게 끓여주신 작은 외할머니의 그 미꾸라지 찌개맛은 영원히 잊히지 않는 추억의 맛이다
또 곶감을 몰래 빼먹는 맛도 일품이다 하지만 귀한 곶감을 함부로 먹을수는 없었다 다만 곶감을 깎고난 감껍질을 말린 것은 언제나 마음놓고 먹을수 있었다 깨끗이 씻은 비료푸대에 감껍질을 가득 담아 김천으로 가지고 오면 최고 맛있는 간식이었다 껍질중에서 잘 고르면 얇은 껍질이 아닌 칼질을 깊게하여 감살이 붙은 굵은 껍질을 찾으면 곶감먹는 정도의 행운이란 생각이 들었다 외가집은 화장실이 두군데 있는데 부엌쪽 화장실을 주로 이용했었다 사랑방 화장실은 너무 외지고 무서웠다 또 안방위에는 미닫이 문으로 가려진 윗방이 있는데 독특하게도 방이 두개인데 미닫이로 구분하여 만든것도 신기하였다 안방은 부엌 쪽문이 있어 밥상을 들이거나 물릴때는 항상 그 문을 사용하였다 우리집에 없거나 다른 구조라 신기하였다 외할머는 밥상을 받으시면 언제나 소주를 반주로 드셨다 당시에는 전혀 이해를 못했지만 그 반주는 속을 달래는 한풀이였고 약이었다 술을 잘 먹지 못하는 친가식구들에 비해 비교적 술을 잘 마시는 내 체질은 외가를 닮아서이다
모든 기억을 쓸수 없어 몇가지만 적었지만 외가집은 추억 덩어리이자 추억맛집이고 추억 그 자체이다 43살에 손자를 본 외조부모의 심정이 이해가 된다 딸만 낳다가 막내를 아들로 두어 맘고생을 엄청 하신 당신들과 비교하여 큰딸이 시집가서 떡하니 손자를 선물하니 그 얼마나 안도하고 기뻐하셨을지 짐작이 된다
11년도쯤 휴가기간에 집사람과 아이들을 데리고 외가에 들렸는데 내겐 추억묻은 장소와 공간이라 신이 나서 재실과 그 앞의 연못과 소나무를 설명하고 그곳에서의 추억과 어떻게 놀았는지 자세히 얘기했지만 다들 관심조차도 가지지 않아 무척 서운했던 기억이 있다 현재 외가집은 허물어졌고 그 자리에는 청도김씨들의 신도비와 비석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생경스럽기만 하다
공간은 남았지만 사람이 사라져 더욱 더 낯설다 그래도 맘속에는 전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