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외담임선생님
내가 다닌 한일중학교는 기독교재단의 학교였다 한일이전의 교명이 시온중학교이니 다들 알수 있을 것이다 김천에는 남중은 5개 학교가 있고 여중은 3개 학교가 있다 우리 학교는 비교적 시내 한복판에 있는 학교였다 길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학교가 김천국민학교였고 이 자리는 조선시대의 역참이 있던 자리이니 김천의 중심가였다 학교운동장은 작다못해 대각선으로 50미터 정도되는 아주 작은 학교이다 100미터 달리기나 멀리던지기는 바로 앞에 있는 김천국민학교에 가서 해야 했다 축구라도 할려면 큰공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테니스공으로 축구를 하였으며 골대는 없고 농구골대의 기둥을 맞추는게 골이었을 정도로 작은 학교였다 교정이라고 해봐야 어디에서든 한눈에 다 볼수 있었다 지금은 교명이 석천중학교이다 자랑스런 선배는 90년대 마라톤의 대부인 정봉수 감독이다 코오롱 감독이면서 황영조 이봉주 등을 세계적인 선수로 키워내신 분이셨다 증산 아흔 아홉고개길에서 산악 훈련을 하는데 너무 힘들어 지나가는 자동차에 몸을 부딪히고 싶을 만큼 괴로웠다는 황영조의 인터뷰를 본적이 있는데 증산은 정봉수 감독의 고향이다
한일중학교는 입학할 당시에 학부모들이 선호하는 학교가 아니었다 명문으로 이름난 김천중학교나 공부를 많이 시키는 문성중이 인기가 있었다 전교에서 10등 내외를 오르내리던 나를 위해 부모님은 중3때 과외를 시켰다 과외선생님은 당시 영어를 가르키시던 담임선생님이다 문성중학교에서 전근을 오신 담임이신 이석진 선생님은 댁이 황금동이었는데 일주일에 두번 댁에서 과외를 하였다 5명 정도가 한번에 배웠다 학교에서와는 달리 친절하고 상세하게 알려주셨다 또 과외에서 배운 내용들이 실제 시험문제로 출제되니 성적이 자연히 오를수밖에 없었다 토요일 오후에는 빨리 집에 가고 싶어 하였다 주말이 지난 월요일에는 밭에서 수확한 복숭아를 가져다 드리기도 하였다 당시 과외비와 별도로 이런 선물들을 하였는데 이는 과외선생이 학교선생님이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학기초부터 시작한 과외가 무난히 계속되다가 5월에 전두환 정권이 국민들에게 인기있는 정책을 하느라 모든 학생들의 과외를 전면금지 하였다 과외금지 조치에 어쩔수 없이 과외를 그만 두었다 과외로 친해진 선생님은 나를 이뻐해 주셨다 학생들의 적금을 거두는 일, 필요한 개인 심부름을 시키는 등 애정을 보내주셔서 무난한 학창시절을 보낼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질풍노도의 사춘기라 지독한 성장통을 앓고 있었다 육체적으로도 중3때 갑자기 키가 너무 커서 척추가 크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허리통증으로 대구의 큰 병원까지 가서 검진할 정도였다 1년에 16센티미터를 컸었다 정신적으로는 조부의 죽음과 사춘기가 겹쳐 힘든 날들을 보냈다 아프고 부끄럽고 창피한 사춘기였고 상승곡선이었던 인생의 그래프가 꺾이기 시작하였던 시기로 힘들고 괴로운 청소년기가 시작된 시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