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은 전투가 없는 한겨울이나 휴전회담중 소강상태였던 때에도 쉼없이 철저한 준비태세를 갖추고 있었으며 모든 분야에 소홀함이 없는 완벽한 수군으로 바꾸어 나갔다
수군기지 주변의 토지를 개간하여 둔전을 만들어 군량을 자체 조달하였다 생선을 잡고 해조류를 채취하였고 당시에는 천일염 염전이 아닌 자염법으로 소금을 만들었다 천일염 염전은 일제시대때 도입되었다 목화도 재배하여 면화로 군복과 돛을 만들었다 밭농사를 지어 콩을 수확하여 된장을 담그고 생선으로 젓갈도 만들었다
배를 만들고 병장기도 제작하고 병영을 건설하고 철과 구리로 무기와 탄약도 만들고 값비싼 화약도 만들어야 하는 등 조정의 지원은 하나도 없이 수군은 전부 자급자족해야만 했다
조선수군 식사는 배에서도 솥에다 된장을 풀고 생선과 어패류, 채소를 넣고 끓여서 밥과 함께 하였다 해물된장찌개쯤 될듯 하다 난중일기 92년 11월 21일자에 청어 1만 3240두름을 시장에 내다 팔아 곡식을 구매하였고 12월 4일에는 청어 7000두름을 곡식구매선에 실어 보냈다고 적었다 1두름은 청어 20마리이니 어마어마한 양이다 소금과 생선을 팔아 군량을 구하고 병영을 건설하여 막사를 짓고 면포를 만드는 등 조선 수군은 못하는게 없는 팔방미인이었던 것이다
장군은 수군의 총판옥선이 250척 이상이 되면 왜군의 전투 역량이 적선수가 얼마가 되든지 승리할수 있다고 생각하여 전선의 건조에도 박차를 가하였다
93년 7월 전라좌수영을 여수에서 견내량을 지켜 왜군의 남해 진입을 막을수 있는 요충지인 한산도로 이전하였다 거제도를 멀리 돌아서 남해에 오더라도 당포를 지키면 되니 한산도는 남해를 지키는 최고의 길목이라고 할수 있다 93년 8월 1일 삼도수군통제사 종2품에 임명되었다 장문포 전투가 있었던 94년 10월 이후 휴전 회담이 진행되고 정유재란이 있기까지 이순신 잡기 놀이가 시작되었다 선조를 비롯한 원균 윤두서 등 조정의 대신들과 고니시 유키나가 등 왜적의 작전이 난무한 시기이다 94년 11월 삼도수군통제사 직위를 반납하려고 했으나 반려되었다
95년 11월 1일 일기에서 조정에서 보낸 편지와 원흉이 보낸 답장이 지극히 흉악하고 거짓되어 입으로는 말할 수 없다 기만하는 말을 무엇으로도 그려내기 어려우니 하늘과 땅사이에 원균처럼 흉패하고 망령된 자가 없을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전투중 원균은 조선어민의 목을 베어 왜군의 머리로 가장한 사실이 있는데 이를 보고하려 했으나 원균의 사과와 요청으로 그 사실은 빼고 장계를 올린적도 있었다
결국 95년 2월 원균을 충청병마절도사로 임명하여 조정은 갈등을 피하려 하였다 원균은 충청병사로 재직하던 95년 8월 사헌부에서 탄핵하였지만 선조의 반대로 탄핵되지 않았고 96년 1월에는 사헌부의 처벌건의가 있었으나 선조가 전쟁의 시기를 이유로 처벌되지 않았다
97년 1월 11일 경상우병사 김응서는 왜적의 이중간첩인 요시라가 곧 있을 가토 키요마사의 재입국시 해상에서 요격해 달라는 고니시의 전갈을 가져왔다 이에 김응서는 1월 19일 장계에서 고니시가 말하길 회담이 결렬되는 것은 가토때문이니 가토가 모월 모일 가덕도에 정박하니 기습해달라는 전갈이 왔다고 보고하였다
선조는 1월 21일 권율로 하여금 한산도에 있는 장군에게 요시라의 말대로 수군은 가토가 오면 출전하여 처단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중간첩 요시라는 김응서의 진영에 마음대로 드나들며 첨지중추부사 정3품 당상관 교지를 받고 은자 80냥까지 선물받은 고니시의 간첩이었다
장군은 이를 믿지 않았으나 전선을 이끌고 부산 방향으로 위력시위에 나섰다 당시 가토는 이미 1월 13일에 서생포 다대포에 도착하였고 15일에는 장생포에 상륙 왜성에 있었다
선조는 남이신을 규찰어사로 임명하여 진상을 파악하라고 지시하였다 한산도의 수많은 군사들과 백성이 장군의 억울한 사연을 호소했으나 가토가 7일이나 머물 동안 나가 싸웠다면 생포할수 있었는데도 이순신이 머뭇거려 가토를 놓쳤다고 조정의 분위기와 선조의 입맛에 맞는 허위보고를 올렸다
97년 1월 22일 원균은 자신이 해전의 전문가로서 수백척의 수군으로 부산 앞바다에서 시위를 하면 가토도 겁을 먹고 퇴각할 것이다 바다를 지켜본 경험자로서 올리는 보고라며 장군을 폄하 모함하였다
97년 1월 27일에는 선조는 이순신이 부산왜영을 불태웠다고 조정을 속여 보고 하였다며 이제는 가토의 목을 가져오더라도 용서할수 없다 이에 서인인 윤두서는 이순신의 파직을 요청하였고 남인이자 장군의 영원한 멘토인 유성룡도 파직에 동의하였다 이제 고립무원이다
부산왜영 화염사건은 96년 12월에 이원익의 지시로 왜군진영에 불을 지른 사건인데 부하장수인 안위 등의 보고를 접한 이순신이 부하들의 성과를 쓰고 이들을 포상해야 한다는 보고였다
2월 6일 선조는 원균과 교대한뒤에 체포하라고 했는데 휘하 장수를 거느리고 병졸들을 지휘하고 피난민을 비롯한 백성들에게 신망을 얻고 인기가 있는 장군에게 겁을 먹은 조치인 것이다 결국 장군은 가덕도까지 무력시위를 다녀온 2월 26일에 한산도에서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고 의금부로 압송되어 3월 4일에 투옥되었다
3월 13일 선조는 조정을 속여 임금을 업신여긴 죄, 적을 놓아주어 나라를 저버린 죄, 장계를 단독으로 보고하고 남의 공로를 가로챈 죄, 한없이 방자하고도 거리낌이 없는 죄를 들어 죽여야 마땅하다고 강조하였다
이에 판중추부사 정탁이 이순신 신구차 즉 진정서를 썼는데 이순신은 장수의 재질이 있으며 수륙전 모두 못하는 전투가 없다 이런 인물은 쉽게 얻지 못하며 백성들이 촉망하는 사람이며 왜적들이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장군이니 은혜로운 하명으로 앞으로 공을 세우게 하면 성상의 자애로운 성은을 갚으려는 마음이 있을 것이고 위급한 시기에 장수를 죽이는 것은 좋지 않다고 청원하였다
4월 1일 의금부에서 석방된 장군은 이날 통음을 하였다 총사령관격인 도원수 권율이 있는 합천 초계로 가서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4월 11일 모친 변씨께서 옥에 갇힌 장군을 보기 위해 순천에서 뱃길로 오다가 돌아가셨는데 장군은 꿈자리가 뒤숭숭하다고 모친을 걱정하였다 12일 집안의 종에게서 모친 사망 소식을 듣고 버선발로 마당에서 발을 구르며 슬퍼하셨고 16일 영구를 맞이하여 상여에 싣고 아산집으로 왔다 일기에서 다만 빨리 죽기만 못하다고 쓰셨다 19일 금부도사의 재촉에 두형도 죽고 없어 상주역할을 해야함에도 영전에 인사만 하고 길을 나섰으니 불효한 그 마음이 짐작된다
원균은 97년 3월 9일 기문포해전에서 적선 3척을 격침하고 수급 47개를 베었다고 장계를 올렸으나 권율 등 다른 장수들의 장계에서 병사 140명의 전사가 있는 패전임이 들통나고 말았다
6월 18일에는 안골포에서 보성군수 안흥국이 전사하고 7월 7일에는 부산포 공격에 나섰다가 판옥선 20척을 잃기도 하여 조정의 신뢰가 떨어지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장군을 모함할때와는 정반대로 3월 29일 장계에서 수륙합동작전이 필요하고 요시라의 말은 거짓임으로 실상을 알수 없다면서 육군이 먼저 공격하면 수군이 토벌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면서 공격에 나서지 않고 있었다 이에 권율은 7월 11일 원균을 곤양으로 불러 출전하지 않는 항명죄를 물어 곤장을 때렸다
선조실록에 의하면 선조와 권율은 원균에게 전함대의 출동을 명령하지 않고 경상우수사 배설,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원균 등이 교대로 가덕도 앞바다에서 해상 위력시위를 하고 적선들의 보급로만 끊으면 된다고 하였다 한산도 운주당은 장군이 참모회의를 하고 부하들의 건의와 애로사항을 듣고 부대원들이 소통하는 공간이었는데 원균은 첩을 들여 살게 하였으며 간언하는 부하들을 피하고자 울타리를 쳐서 접근을 막아 활쏘기나 훈련은 고사하고 참모들도 원균 보기가 힘들었다 또 원균의 먼 친척이 쓴 은봉전서에서 삼도수군통제사의 직함을 영화롭게 여기는게 아니라 오직 이순신에 대한 치욕을 씻게 된 것만이 통쾌하다고 하고 왜군과의 전투는 포를 쏘고 편전을 쏘고 칼로 무찌르면 된다는 안이한 말에 그 친척마저 혀를 찻다는 기록이 있다
원균이 장군보다 나이는 5살이 많고 급제는 9년이 빠르다 요즘 말로 하면 꼰대중의 꼰대로 꼴통중의 상꼴통이다
7월 14일 이순신 장군이 고생하고 애써 만든 조선 수군 134척의 전 함대가 새벽시간 술에 취한 원균의 명령에 따라 출동하였다 긴 항해 끝에 당일 오후 절영도에 도착하였다 한산도에서 부터 노를 저어 온 격군들의 피로는 상당했다 왜군들은 남해안 왜성을 지키고 있어 이같은 상황을 전부 파악하고 있었으며 조선 수군은 변변히 쉴곳을 찾지 못하였다 왜군은 판옥선에 가까이 접근했다가 조선 수군이 따라오면 도망가기를 여러 차례하였다 점점 지쳐가는 격군들과 섬하나 없는 부산 앞바다의 파도에 수군은 힘을 잃었다 마침내 판옥선 10척이 파도에 휩쓸려 표류하기 시작했다 부산 도모포에 5척, 울산 서생포에 5척이 표류로 떠밀려 내려가 전멸하고 말았다 그제서야 상황을 인식한 원균은 배를 돌려 노를 젓느라 목이 마른 격군들을 위해 가덕도에서 물을 긷으려 400명이 내렸으나 적의 기습에 깜짝 놀라 도망가 버렸다 예전에 이순신 장군도 가덕도에서 물을 떠다가 병졸 3명이 왜군에 생포된 적이 있었다 그때 장군은 가덕도를 포위하고 포를 쏘는 등 시위를 하여 포로를 구출하였다 이에 반해 원균은 급히 배를 돌려 거제도 영등포로 도망가버렸다 애먼 가덕도의 병졸 400명만 전사하고 말았다 이게 7월 14일 하루동안에 일어난 일이었다 15일은 영등포에서 가까운 칠천도와 거제도 사이의 칠천량으로 옮겼다 칠천량에서 앞뒤로 망을 세우고 술판을 벌이다가 잠든 16일 새벽 적의 기습을 받고 칠천도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은 전멸 궤멸하고 말았다 원균도 고성 춘원포로 도망가 산에서 죽었는데 날이 더워 윗옷을 벗고 숨을 헐떡이며 나무 아래에 있었는데 멀리서 보니 왜군이 칼을 들고 쫓았다고 한다 당시 원균의 입에서는 술냄새가 났다고 한다 칠천량에서 전날 미리 도망간 배설의 판옥선 12척만이 살아 남았다 배설은 명량전투를 앞두고 도망가서 권율에게 처형되었다
원균이 부산을 공격하기 위해 조선군의 반이나 일부만 출전했다면, 또 칠천량에서 숙영하지 않고 멀지 않은 한산도 본영으로 철수 했다면 왜군도 조선수군을 궤멸시키지는 못했을 것이다 거제도 칠천량이 보이는 언덕에 가면 칠천량해전공원이 있다
장군이 고생하며 구축한 조선 수군
잘 훈련된 병사 1만여명
판옥선 120척
한산도 본영에 쌓인
군량미, 화포와 화약, 수많은 군수물자, 피난민, 남해를 지키는 길목과 방어시스템 또 보이지 않지만 왜군들의 두려움, 조선 수군의 이기는 자신감과 하늘높은 사기등 이 모든 것들을 술에 취하고 첩과 기생을 가까이 한 원균의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일이 있을 만큼의 판단착오로 불과 3일만에 조선 군사력의 8할이 파괴되고 말았다 이는 세계전투 역사상 최고 최대의 사건이다 해전과 육전을 통틀어 기네스북에 올라야 했을 전투이다 그것도 단 3일만이다 모든걸 잃었다
통탄할 일이다
1등선무공신 원균
위기는 영웅을 부르고
영웅은 우리 곁에 나타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