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의 우백호인 인왕산에 비해 산세가 약한 좌청룡 낙산은 지기가 약하다고 한다 우백호는 차남이나 지손들의 발복이 강하고 좌청룡은 장남이나 장손들의 기를 상징하는데 낙산의 지세가 약해 조선왕들이 장자계승이 27명중 불과 열명이 안된다는 말도 있다
또 이를 잘아는 대원군이 동대문인 흥인문을 개축하면서 흥인지문이라고 글자수를 늘려 기를 돋우려고 했다는 말도 있다
숭례문의 글자는 가로현판이 아닌 세로현판인데 이는 멀리 관악산이 화산이어서 불의 기운이 강해 이를 누를 필요가 있어 숭의 한자가 위에서 누르는듯한 형상이고 례의 글자가 위로 불타오르는 형상이라 세로 현판으로 만들었다는 얘기도 있다 아이러니하게 숭례문이 불에 타는 비극은 오히려 세로 현판이 주는 안타까움으로 인식될수 밖에 없음은 모순의 극치라 하겠다
숙정문은 원래 문만 있고 문루는 없었는데 70년대 복원하면서 문루까지 만들었다
북악산 정상 주위에 가면 소나무와 바위에 총탄 흔적이 있다 김신조의 121사태때 총격전의 흔적이다 북악산 정상에서 가파르게 내려오면 부암동이다 여기에는 서울에서 가장 유명한 통닭집이 있는데 계열사라는 집이다 먹어보면 조금은 특별한 집이다 창의문은 인조반정때 창의문 바깥의 세검정 정자 아래 바위에서 칼을 씻고 반정의 출발을 위해 모인 곳이고 창의문 현판에는 반정공신들의 이름이 적힌 현판이 있다 사실 세검정은 인조반정으로도 유명하지만 왕조실록을 다 쓰고나면 그 종이를 씻는 세초를 하고 종이를 말리는데 선대왕의 실록을 쓴다고 고생한 이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고 세초한 자리가 세검정이다 세검정 옆에는 연산군이 질퍽하게 놀았다는 탕춘대도 있다
창의문 아래에는 시인 윤동주 기념관이 있다 윤동주는 연희학교를 다닐적에 수성동계곡 입구에 살았는데 멀리 떨어진 창의문 아래 기념관이 있다 별로 볼만한건 없더라
또 석파 이하응의 별장도 창의문 아래에 있다 김흥근의 별장인데 대원군이 살려고 해도 팔지 않아 대원군이 꽤를 내어 이곳에 고종을 하룻밤 자게 하였다 임금이 잠잔 곳은 신하가 잘수 없기에 할수없이 대원군에게 팔았다는 얘기가 있다 인왕산 자락의 잘 가꾸어진 별장이긴 하지만 입장료가 서울미술관 관람까지 포함하지만 1인 25000원이라 호갱인 느낌이 들었다
가파르게 인왕산을 오르면 초입에 연리지가 한그루 있다 또 인왕산 정상에 오르면 서울 시내 경치가 아주 좋다 조금 내려오면 치마바위가 있다 치마바위는 중종때 이야기이다 연산군의 배다른 동생인 진성대군이 형의 위세에 눌려 꼼짝 못하고 살다가 박원종 등의 반정때 병사들이 진성대군 집을 포위하였는데 진성대군은 연산군이 죽일려고 보낸 병사로 오인하여 자살할려고 했으나 부인 신씨가 말들의 머리가 집방향이면 잡을려고 온것이고 말 엉덩이가 집 방향이면 보호할려고 온 병사들이니 확인해 보자 하였다 말의 엉덩이가 집 방향이라 안심하였고 반정에 성공하여 임금이 되었으나 중종의 장인이 신수근으로 연산군과는 처남매부사이로 반정에 반대하였다 반정에 반대한 역적의 딸이 왕비가 될수 없다는 반정공신들의 상소에 중종은 임금이 된지 1주일만에 중전인 단경왕후 신씨를 궁밖으로 내쳤다 이후에 부인 신씨를 중종이 그리워 한다는 얘길 전해들은 부인이 인왕산 치마바위에 자기가 입던 붉은색 치마를 걸쳐놓아 중종으로 하여금 치마를 보고 그리움을 달래게 했다는 얘기가 전해지는 바위가 치마바위이다
하지만 이건 그냥 지어낸 얘기라고 생각한다 화강암의 철분이 빗물에 산화하면 검붉은 색이 된다 또 중종은 단경왕후를 보낸후 곧바로 장경왕후랑 혼인한다 그후 후궁도 여럿두었고 실록에는 부인 신씨를 그리워 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그냥 세속에 떠도는 이야기일 뿐이다
인왕산을 내려오다 보면 지금도 군부대가 있다 예전부터 서울의 방공포대가 배치된 요새임을 걷다보면 알수 있다 인왕산과 신촌의 안산을 연결하는 다리가 있다 인왕산 자락을 내려오면 호랑이 동상이 있다 예전에는 인왕산에 호랑이가 자주 나타났는데 그만큼 민가 가까이에 출몰함으로 느끼는 불안함의 크기일거라 생각한다 서대문인 돈의문쪽으로 내려가면 홍난파가 살았던 집도 있고 권율장군이 살던 집터도 있다 돈의문 바깥인 농협박물관 자리가 백두산 호랑이 김종서의 집터이다 이방원의 철퇴를 맞고 잠긴 돈의문을 피해 숭례문을 통해 도성으로 들어가고자 하였으나 미리 이방원이 숭례문도 막아 작은 아들의 사돈집에 숨어있다가 이튿날 죽었던 것이다 돈의문 터 옆에는 강북삼성병원이고 그 경내에 백범 김구선생이 살다가 최후를 맞이한 경교장이 있다 한번은 둘러볼만한 곳이다 또 서울역사박물관이 있고 경희궁도 바로 옆이다 구세군회관 옆에는 새문안교회가 있는데 이곳은 정종이 퇴위하고 살던 집터이다 이방원의 측근이자 실세인 이숙번이 돈의문 옆에 살았는데 통행하는 사람들이 너무 시끄러워 문을 폐쇄하였다 이에 불편한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하였으나 이숙번은 집옆의 돈의문을 정종이 사는 집근처로 대문을 옮겨 버렸다 옮겨진 새문이 돈의문이고 그 안쪽이 새문안이 되었다 지명과 교회이름이 새문안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신의 특권이 상왕인 정종의 위세를 뛰어넘는 것이다 그렇지만 결국 이숙번도 태종에 의해 팽 당하여 지방으로 좌천되었고 태종의 명에 의하여 서울에 돌아오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