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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드시러 오시랍니다

강동준 2025. 2. 17. 10:33

음력 9월 중순은 농촌에서는 한창 바쁜 농사철이다 수확이 시작되는 시점이라 눈코뜰새 없이 바쁘기도 하지만 일년 농사의 수확이라 기쁘기도 한 풍요로운 시기이다 가을 이슬이 마르기 전인 이른 시간에 발걸음에 신이 난 나는 이슬에 신발이 젖고 발이 시려도 마냥 즐겁게 뛰어다니며 마을 집들중에서 같은 일가인 대소가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건네집에 들러 할아버지 할매요 진지 잡수러 오시랍니다 그러고는 밑의 집에 들러서도 진지 드시러 오시랍니다 큰집에서도 새집에서도 대문간에도 어럼터 할매집에도 들러서 진지 드시러 오시랍니다를 하고 다녔다 이날은 할아버지 생신이라 동네 집안 어른들을 초대하여 아침밥을 대접하는 날이다 또 이날은 나의 생일이기도 하였다 할아버지 생신날이 장손자인 나의 생일이니 잘 차려진 할아버지의 생일상은 나의 생일상이라 생각하면 잔칫상 부럽지 않은 것이다 을사년 9월 12일 할아버지 45세 생신날 장손주가 태어난 기쁜 날이다
내 고향은 김천에서 제일 넓은 들판인 개령들의 크트머리쯤인데 멀리 보이는 감천과 감천지류인 어모천을 끼고 있는 높이가 2백미터를 겨우 넘는 광덕산 아래 30여호 되는 조그만 마을에서 태어났다 강가와 김씨 이씨가 대부분이고 오씨 정씨 장씨 등 몇가구가 사는 화목한 마을이다 높은 산이 없어 그런지는 몰라도 큰 인물도 없고 자랑할만한 고택 오랜 전통은 없지만 넓은 들판이 있고 큰 내가 있어 농사짓고 살기에는 풍요롭다 소백산맥이 멀리서 큰 가뭄과 태풍을 막아주는 안정된 기후와 풍토를 가진 살기 좋은 땅이다
신천강가 6남매의 맏이인 아버지와 청도김가 5남매의 맏이인 어머니는 당시에는 비교적 단촐한 3남매만 낳았는데 두분 모두 형제 많은 집에서 자라 가족계획을 하셨다고 한다 두살터울인 누나와 세살 아래인 남동생을 둔것이다 외조부는 내가 태어날때 43세였다 친가와 외가 양가 모두의 맏손주로 태어나 귀여움과 사랑은 넘치도록 받고 자랐다 그 추억과 사랑을 다 기억하지도 못하지만 기억에 남은 것만 해도 너무 많아서 적을수도 없을 지경이다 45세 43세에 친손주 외손주를 본 할아버지의 충만한 사랑과 기쁨은 누구라도 미루어 짐작할수 있을것이다
난 출생신고를 정확한 날자에 하여 호적과 실제 생일이 일치한다 당시에는 유아 사망율이 높아 조금 키우고 난 뒤에야 출생신고를 하는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난 제날자에 신고를 하였는데 아마 할아버지가 너무 좋아서 그러셨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내 출생신고를 하고나니 누나의  출생신고가 안되어 있어 신고하는 당일로부터 과태료를 부담하지 않는 날까지 최대한 멀리 날자를 잡고 출생신고를 하였다 그래서 누나는 을사년 2월생으로 신고되었다 쌍둥이도 아닌데 같은해에 나란히 남매가 신고되었다 잘못된 출생신고는 훗날 교직에 몸담은 누나에게 큰 선물이  될수 있었지만 2년이나 늦은 호적은 어르신들이 확고하게 생각한 남아선호의 흔적이라고 하겠다 요즘은 이런 얘기조차도 없는 시절이니 불과 몇십년만에 문화와 풍조가 바뀌었으니 얼마나 빠른 속도로 변하는 사회와 나라인지 실감할수 있다
신룡2리인 우리마을은 속칭 오룡골이라 불리운다 김천문화지를 봐도 용과 관련된 얘기는 없다 동네앞 저수지가 있지만 이 저수지는 일제시대때 동네 사람들이 부역으로 파내고 제방을 쌓은 역사가 짧은 저수지이다 낮은 야산이 있고 북향마을로 특별할만한게 하나도 없는 그저 그럭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