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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의 탈 농촌

강동준 2025. 2. 18. 10:15

농사를 주업으로 하는 농촌에서는 대부분 경제권을 그집의 가장이 쥐고 있다 도시의 급여생활자들은 전업주부들이 경제권을 가진것에 비해 가을에 수확하여 일년여 긴 기간 지출하고 상대하는 사람들이 외간남자들이라 아녀자들이 경제권을 가지긴 어렵다 또 우리집은 할아버지가 젊어서 오랜 기간 가장 노릇을 하셨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1920년생이셨는데 두분 모두 당시로서는 드물게 국민학교를 졸업하신 분들이셨다 할머니는 한자가 많은 신문을 줄줄 읽으실 정도였고 할아버지는 영어 일어 중국어도 하셨는데 어린 내가 그 수준을 알수는 없었다
어린시절 나는 집안의 가장인 할아버지의 절대적 영향아래에서 성장하였다 농촌의 가장은 그 집에서 절대자였다 부모님도 일을 하거나 용돈을 타거나 외출을 하거나 무엇을 하든 가장의 절대적 권위를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가장이 시키는 대로 계획한 대로 모든 일이 진행되어야 했다

증조부 밑에서 농사짓고 살던 할아버지는 속칭 머리에 먹물이 들어 탈농촌을 결심하고 집을 떠나게 되었다 경주로 가서 고물상 사업을 하다가 실패하여 되돌아 왔었다 또 강릉에서 잡화점을 하던 먼 친척을 따라 하다가 거래처중의 하나이던 양양의 철광석 광산에서 일하게 되었다
3천명 정도의 광부가 있던 철광석 광산에서 할아버지는 식당에서 일하셨는데 식당의 부식재료를 구매하는 책임자였다고 한다 4남매의 맏이인 할아버지는 두 남동생과 아버지, 고모와 같이 광산의 사택에서 생활하였고 아버지는 양양에서 초등학교를 몇년간 다니셨다
훗날 종조부와 아버지를 모시고 양양 광산터에 가니 여기가 소장관사이고 여기가 식당자리이고 여기서 광석을 삭도에 실어 양양항까지 보냈다며 어린시절을 추억하시는걸 보았다 광산에서 일하다가 해방이 되어 소련군이 진주하여 도저히 살수가 없어 가재도구를 비롯한 모든 것들을 이웃집에 맡겨두고 꼭 필요한 물품만 챙겨서 강릉으로 대관령을 넘어 제천을 경유하여 김천까지 보름에 걸쳐 오느라 가족들이 고생하였다고 한다
두번에 걸쳐 시골탈출을 하였으나 결국에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셨다 증조부께서는 괜히 공부를 시켜서 농사일도 하기 싫어 나간다는 후회를 하셨다고 한다
두번의 탈농촌은 실패하였지만 할아버지의 인생은 늘 도전의 연속이었다 금릉군의 통계직 공무원 시험도 도전하여 공직에도 계셨고 한의학 공부에도 매진하여 동네 한약방이셨고 60년대에 포도를 심어 과수 재배를 시작하는등 변화와 도전을 마다하지 않는 생을 사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