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는 일제시대때 사회주의에 심취하였다고 한다 양양에 계실때에도 레닌 맑시즘에 빠져 있었다 해방이후 시골에 계신 증조부모님을 모셔야 했고 식솔들이 많아 도저히 양양에서는 살수가 없어 낙향하셨다 그후 625때는 면사무소 직원으로 근무하다가 북한군에 부역을 하게 되었고 국군이 수복하게되자 부역자를 처벌하는 것을 우려하여 후퇴하는 인민군을 뒤늦게 쫓아가셨는데 상주 문경 충주까지 따라갔지만 결국에는 집으로 돌아오셨다고 한다
김천 경찰서에서 이웃마을로 부역자를 찾아왔는데 부역자가 산으로 도망가다 총을 맞아 숨졌다고 한다 그 경찰이 우리집에 찾아와서 할아버지를 찾기에 집에 없다고 하여 따돌린 작은 할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당시 면사무소에 근무중인 할아버지를 찾아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얼른 피신을 하였다 밤중에 집으로 오신 할아버지는 집옆의 대밭에 땅굴을 파고 숨어 지냈다고 한다 낮에는 굴속에 숨어있고 밤이면 음식을 먹고 지내는 생활을 1년 넘게 하셨다 그 상태로는 도저히 살수가 없어 김천경찰서에 지인을 통해 로비를 하여 당시 황소 한마리 값을 뇌물로 주고 자수를 하였고 김천경찰서에서는 무사히 풀려날수 있었다
그런데 이같은 사실을 안 개령지서에서는 할아버지를 붙잡아 모진 몽둥이 찜질과 고문을 하셨다고 한다 몇날 며칠을 맞아 거의 주검상태로 풀어주었는데 종조부가 리어카에 할아버지를 싣고 와서 변소에 대나무통을 넣어 모은 똥물을 먹고 겨우 회복하였다 당시 몽둥이로 맞은 장독에는 별다른 약이 없어 똥물을 먹는게 유일한 약이었다고 한다
이후 남북대립이 심했던 70년대에 삼촌은 사관학교 입학시험에서 연좌제에 걸려 면접에서 낙방하였고 80년대는 고종사촌이 청와대 외곽경비를 담당하던 부대에 근무하게 되었는데 그때도 신원조회에 예전 할아버지의 부역사실이 나타난것으로 기억한다 사촌동생은 경비단에 근무하여 전역하였다
인민군에게는 소 한마리를 빼앗기고 기부증만 받았고 국군에게는 소한마리 값을 로비자금으로 써서 풀려난 우리 집안의 현대사의 한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