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역한 뒤에 인생을 대충 살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 나름 열심히 공부하였다 낮에는 도서관에서 밤에는 독서실에서 살다시피 하였다 김천대학교 교수이신 이수원형도 그때 만나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2학년 2학기가 되어 교수님이 연구실에서 타임지 1P씩 독해를 매일 해주시겠다고 하셨다 처음에는 서너명이 모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줄어들어 마지막에는 나혼자 남았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도서관에 나가지 않고 연구실에 눌러앉게 되었다 박사과정의 연배가 차이나는 선배들과 함께 어울리며 논문집을 발간할때는 조교처럼 발간을 돕기도 하고 논문 집필을 도와주기도 하였다 이런 조교생활을 대학원 졸업할때까지 하면서 지냈다 연구실에 있으면서 자연스럽게 교수가 되는 길을 모색하였고 지방의 특성을 살려 인적네트워크를 잘 활용하면 길이 열릴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선배들도 어렵지만 한분씩 한분씩 풀려나가는걸 지켜볼수 있었다
92년도 대학원 졸업과 동시에 교수님의 배려로 바로 전문대에 강의를 할수 있었다 그 학과는 이미 선배님 두분이 교수로 재직하여 나름대로는 편하게 지낼수 있었으며 도움도 직접적으로 받았다 그런 생활속에서 박사과정을 어떻게 언제쯤 입학할지 고민하고 있을즈음인 93년도 가을이었다 난데없이 맞선을 보라는것이었다 난 수입도 별로 없고 방학때는 백수에 가까운 학생이라 결혼할 입장이 아니었다 집안이 넉넉하여 결혼을 하고서도 공부를 계속할수 있는 경제사정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은 맞선을 강요하였다 난 맞선을 보지만 결혼을 않는다는 조건으로 승락하였다
옆동네에 사는 부친의 절친이자 동기인 영숙이 부모님이 동생이 죽고난뒤 엄청 신경써서 위로해 주었고 술벗도 되어 주었다 모친들끼리 시내 음식점에서 따로 만나 술자리라도 가지면 남자들 이상의 뜨거운 우정을 나누었다 반찬을 비롯해 음식을 챙겨 집에 가져다 주었고 넋을 놓고 있는 부모님들을 찾아 같이 아파해주는 그런 절친한 관계였다 그런 영숙 모친이 중매를 한 것이다
당시 남자나이 서른이면 결혼적령기였으며 동생의 사망으로 다른 사람들과 다른 조급함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같은 상황에서 영숙 모친이 중매쟁이로 나서니 그동안의 고마움과 역할을 아는 내가 도저히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영숙모친의 생각은 슬픔에 빠진 부모님은 내가 결혼함으로서 새로운 가족이 생겨 환경에 적응하고 변화를 수용하여 슬픔을 딛고 새인생을 살수 있을거라 여긴듯하다
영숙 모친의 사촌언니가 결혼하여 아포 신촌에 살고 계셨는데 사촌언니는 장모님과 시누이 올케사이였다 사촌언니가 장모님 친정식구였다 당시 집사람도 나이가 들어 20대 후반이 되어 조급한 상황이었는데 시집 안간 처형도 있어 마음이 더 조급할수 밖에 없었다
맞선은 구미시내 호텔 커피솦에서 만났다 우리집은 부모님 누나 영숙모친 나까지 5명이 나와 나란히 앉았고 처가집에서는 장모님 영숙모친의 사촌언니 그리고 집사람 3명이 서로 마주보고 인사를 하는 옛날식 맞선을 보았다 요즘이야 연락처만 주면 각자 알아서 만났지만 난 그 당시에도 자주 볼수 없는 고전적인 맞선을 보았다
호텔을 나와 경양식집에서 돈까스로 식사를 하였는데 천천히 식사하는 집사람의 속도에 맞춰 매너있게 식사시간의 끝을 맞춰주었다 훗날 집사람은 맞선을 여러차례 보았지만 식사속도가 맞는 사람은 나뿐이었다고 한다 난 사실 식사 속도가 엄청 빠른데 그날은 매너를 갖췄을 뿐이다
맞선후 결혼에 관심없던 내게 누나가 처가의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1주일내에 전화를 하는게 예의라고 하면서 전화를 강요하였다 당시 집사람은 조그만 미술학원을 운영하였다 친구와 함께 꽃을 사들고 미술학원을 방문하였다 당사자인 우리는 별다른 말도 없이 지내고 있었다
처가집에서는 장모님의 고향 친구가 옆동네에 살고 있어서 우리집의 재산정도와 집안이 도박이나 음주와 연관이 있는지 가풍은 어떤지를 알아보셨다 또 부모님은 구미 송정동이 외가여서 작은 외삼촌과 친분이 있으신 장인어른과 처가에 대해 상세히 알수 있었다 이렇게 각자 서로의 집안을 아신 부모님들은 가정환경도 비슷하고 사는 모습도 크게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셔서 결혼을 서둘게 되었다 당사자인 우리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았다
93년 11월 28일 맞선을 보고 세번째로 만나는 날인 12월 중순 2번도로 끝무렵에 있던 회집에서 양가 부모님과 우리는 마주앉았다 듣고만 있던 우리에게 양가 부모님은 구체적으로 결혼을 진행시키고 계셨다 예식날자를 정하고 장소도 결정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속에서 모든게 결정되고 있었다 날자는 내 나이가 아홉수에 걸리지 않게 구정전 1월 23일에 하기로 하였고 장소는 아들하나뿐인 우리집의 사정을 감안하여 김천에서 예식을 하는것으로 정해졌다
결혼하라는 강요는 없다는 약속아래 맞선을 보았는데 별다른 흠결을 찾을수 없었던 양가 부모님들의 강력한 추진에 힘입어 우리는 선본지 두달이 채 안되어 결혼을 하였다 당시 우리집은 논을 팔아 아파트 전세자금과 프라이드 차를 사주셨다 당시 나의 소득은 학기중에만 용돈 수준인 월 30만원이 전부였다 집사람은 학원생수에 따라 들쭉날쭉하지만 나보다는 형편이 좋았다 그렇다해도 100만원은 안되는 금액이었다 이렇게 맞선으로 만나 30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 잘 살고 있는걸 보면 인연도 보통 인연은 넘을수 있고 그건 양가 부모님들의 삶의 지혜였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