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후기는 다녀오고 바로 쓰야는데 게으름과 머릿속이 복잡하여 차일피일 미루다가 이제야 쓰기 시작한다.
집사람과 단둘이 며칠을 여행하는건 아마 신혼여행과 결혼 20주년 동남아 여행 그리고 이번이다. 작은애 군대가기전 다같이 갔었던 가족여행과 전역후 작년에 다녀온 먹거리 가족여행도 있지만 둘이 국내 여행은 신행이후 처음이다.
5월 3일 일요일 아침 9시경 출발을 하였다. 날씨가 꾸무리한게 꼭 내마음처럼 흐리다. 선거후 직원들 전부 휴가를 가는데 딱히 갈데도 없어 휴가를 안갈려다가 그래도 쉬는게 낫지 싶어 길을 나섰다. 다행히 차는 막히지 않고 달린다.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다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여행을 하면서 굳이 바쁜 사람처럼 고속도로를 달릴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북천안에서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공주를 행해 국도로 천천히 달리는데 천안이 호두과자로 유명한 것은 알지만 국도변에 주유소, 기사식당이 있으면 반드시 호두파는 가게가 있다. 많아도 너무 많다. 이렇게나 많아서야 경쟁력이 있을까 싶다. 20개 들어있는 호두빵이 5천원이다. 먹어보니 다행히 호두가 들어있다. 호두는 국내 생산량의 30%가 넘는 곳이 바로 지역구이자 고향인 김천이다. 구성, 증산, 대덕, 부항, 지례 그리고 산넘어 영동 상촌까지가 호두 생산의 집산지이다. 여화 ‘집으로’ 촬영 장소가 영동군 상촌이었는데 촬영 현장에 가보았더니 온통 호두였던게 생각난다. 옆길로 말이 샜네. 비가 오락가락하는 사이로 호두를 맛보고 천안을 벗어나니 공주 초입이다. 가는 길이 충청도스럽지 않고 산길이라 영 어색하다. 공주로 들어서니 구시가지는 부소산성을 옆에 두고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다. 먼저 무녕왕릉에 도착하니 주차장이 문을 닫았다. 길건너 청소년회관에 세우고 비가 오는지 안오는지도 모를 정도이지만 우산을 쓰고 송산리 고분군을 향해 올라가니 코로나 때문에 입장료도 받지 않고 탐방객도 거의 없다. 오르고 내려오는 동안에 10명 남짓이다. 낮은 산에 고분인지 언덕인지 모를 정도로 편안한 능선이다. 무녕왕릉을 중심으로 위로 4개의 고분이 있고, 아래로 두 개의 고분이 있다. 설명이 없으면 그냥 완만한 능선이다. 릉은 당연히 영구관람불가이다. 여기서 공주 시가지를 내려다보니 백제 웅진시대가 60여년만에 부여로 옯긴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 웅진의 옛지명은 고마나루 즉 곰나루를 한문으로 표기한게 웅진이고 그후 웅진을 공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금강의 흐름이 돌아나가는 곳이 고마나루이고 그 남쪽의 산이 부소산성이다. 강쪽은 당연히 방어가 유리한 곳이고 시가지쪽도 일부 지역은 절벽으로 되어 있어 방어에 유리하게는 보였다. 그러나 한나라의 수도치고는 너무 협소하다. 또 백제의 각지에서 올라오는 산물들을 수용하기에는 너무 좁아 보인다. 사람이 살아가기에는 땅과 물이 풍부하여야 하는데 이곳은 아무래도 너무 좁다. 그리고 방어에도 그닥 유리한 것도 아니다. 황새바위는 황새가 찾아드는 곳이었는데 죄인 춘향이가 썼었던 큰 칼을 항쇄라고 하는데 조선말 천주교인들을 항쇄를 채우고 300여명이 순교한 바위라고 한다. 공주박물관도 문을 닫았고 바로 옆에 있는 한옥마을도 백제스럽지 않고 그냥 만들어 놓은 평범한 관광지일뿐이다. 그래도 공주밤이 유명하니 군밤을 5천원 주고 한봉지 샀다. 차를 타고 고마나루를 둘러보고는 공주의 유명한 먹거리인 김피탕을 먹으러 갔다. 북경반점이라는 곳에서 파는데 시내 어느 공영주차장앞 골목길에 있다. 찾기도 쉽지 않다. 김치와 피자 치즈를 넣은 탕수육이 김피탕이다. 둘이 먹기에 미니를 시켰지만 양이 많다. 조그만 식당에 앉은뱅이 책상다리를 하고 먹자니 불편하기가 그지없다. 서비스로 주는 콜라를 놓고 다 먹겠다고 기를 쓰고 먹었지만 결국 다 먹지 못했다. 미니, 소, 중, 대, 특대 종류가 이렇게 있다. 미니가 1만 6천원, 특대가 2만 8천원으로 기억한다.
이렇게 작은 공주에서 박찬호와 박세리라는 걸출한 인물이 난게 신기할 뿐이다. 국도를 타고 백제 의자왕 시대에 창건하였다는 천년고찰 마곡사를 향해 나섰다. 공주에서 약 30분쯤 걸렸다. 마곡사 올라가는 데크길이 참 편안해 보였다. 절 옆쪽에 주차를 하고 절집으로 가는데 가는 길이 약간은 이상하다. 산 아래에서 올라가면서 아치교를 건너고 일주문을 지나 사천왕상을 지나 범종루를 지나는게 일반적인 절집의 형태이다. 근데 이 절은 횡으로 가면서 일주문과 사천왕상을 지나야 아치교가 나온다. 이 다리가 세속과 극락의 세계를 구분하는 것인데 어찌하여 일주문과 사천왕상을 지나서 있는지 상식을 파괴하고 있거나 내 지식이 얕음이리라. 또 하나 특이한 것은 무량보전과 대웅전이 같이 있는게 아닌가. 이 절집은 내가 아는 상식과는 판이하다. 대웅전이 겉으로 보기에는 2층 구조로 되어 있는데 내부에는 그냥 단층처럼 되어있다. 그 외는 별다른 특이점은 없다. 템플스테이를 위한 현대식 시설이 절옆에 있는게 어울리지 않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규모도 적당히 아담하고 집도 적당하고 이런걸 두고 백제스럽다고 해야하나.
공주를 떠나 부여를 향해 국도를 열심히 달려 1시간만에 부소산성 입구에 도착했다. 매표를 하고 낙화암으로 천천히 걸었다. 살집이 불어 숨차다. 여기는 산중턱에 매점이 있다. 어떻게 허가가 났는지 궁금하다. 물 한병을 둘이 나누어 먹으면서 어기적어기적 낙화암으로 갔다. 그래도 여기는 사람이 제법 있다. 날이 흐린데도 불구하고 관광객이 있어 심심하지는 않다. 낙화암의 정자는 백화정이다. 이것은 50년대인가에 건립된 것이라 역사적인 사실과는 무관하다. 백제의 3천 궁녀 얘기는 구라일 수 밖에 없다. 의자왕이 당나라에 끌려갈 때 수만명과 함께 갔는데 그 당시의 국력으로 보면 3천 궁녀는 고사하고 궁궐내에 근무하는 인원이 3백명도 되지 않았으리라. 그리고 삼천갑자, 삼천리 등 3이라는 숫자가 아주 많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하니 3천 궁녀는 역사의 승자가 쓴 왜곡된 일임에 분명할 것이다. 낙화암에서 계단길을 내려오면 고란사가 나온다. 고란초와 함께 유명한 고란사 약수물이 있다. 한번 먹으면 3년이 젊어진다는 약수물이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상태라 다시 길을 오르려니 앞이 캄캄한데 고란사 바로 앞에 유람선 선착장이다. 얼씨구나하고 표를 사니 운행 시간이 한참이나 남았단다. 승객이 많으면 시간과 관계없이 운행한다고 안내하니 어디에 있었는지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바로 승선하여 10여분 배를 타고 구드레 나루에 도착하였다. 부소산성 입구까지 아마도 궁궐이었을 잔디밭을 지나 한참을 걸어서 주차하였던 곳으로 왔다. 부여를 더 알고 싶기는 하나 너무 피곤하다. 차에서 잠깐 눈이라도 붙이자는 집사람의 말을 애써 무시하고 차를 타고 다시 강경으로 향했다.
강경을 가보고 싶은 이유는 젓갈이 유명하기 때문이다. 광천이나 곰소항은 가보았지만 강경은 가본적이 없다. 강경을 가는중에 논산 연무대를 지나길래 혹시나 논산 훈련소를 지나갈까 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진짜로 논산훈련소 정문이 보인다. 정문을 들어가면 바로 왼쪽에 23연대가 있다. 난 23연대 출신이다. 그리고 23연대에는 논산훈련소의 법당이 있는 곳이다. 담장너머로 법당이 보인다. 감회가 새롭다. 정문을 보니 기억이 없다 예전에는 작았었던 같은데 정문이 엄청 크다. 보통 예전의 기억이 크게 있기 마련인데 이곳은 반대로 현재가 커 보인다. 이건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나의 20대 초반의 군생활이 시작된 곳이라 희미해진 기억이지만 세월을 거슬러 다녀올 수가 있었는데 집사람은 이런 나의 흥분에 전혀 무감각이다. 추임새라도 넣어주면 좋았을텐데, 심통이다. 정문을 조금 지나니 수용연대가 보인다. 먼저 이곳에서 2일을 보내고 훈련소로 갔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냥 낯선 곳이다. 논산을 지나 강경에 가니 곰소항이나 일반 시장에서 보는듯한 광경이 아니다. 도로 양쪽에 늘어선 젓갈상점을 생각했는데 이곳은 집집이 마을 전체가 젓갈집이다. 하나의 집이 하나의 젓갈집이다. 그래서 동네 전체가 젓갈 동네이다. 걸어서 전부 구경하기에는 힘들어 보인다. 과천 묘사에 참석하던 집안이 이곳에 있다는데 젓갈도 사지 않으면서 들리기엔 너무 낯설어 그냥 가기로 하였다. 이젠 임실로 가야겠다. 치즈마을을 볼 작정이다.
논산에서 익산을 지나는데 20년만에 중건하고 서동요가 사실이 아님을 밝힌 미륵사지 석탑을 볼까 하였으나 동행자의 무관심과 갈림길에서 잠깐 고민할 사이도 없이 지나쳐 버려 그냥 지나왔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동서 양탑을 구경해 보리라. 고속도로를 타지 않고 국도를 달리는 관계로 시간은 조금 더 걸리긴 하지만 길가의 주유소의 기름값이 차이가 시군마다 난다는 것과 중요 농산물이나 지역특산물이 무엇인지 알수 있게 도로변에 파는 물건들이 다르다는 것들을 알아가며 달리는 재미도 있다. 전주쪽으로 가니 기름값이 무척이나 싸다. 임실에 도착하니 어둑어둑하다. 치즈마을에 도착하니 이곳은 목장에서 치즈 만드는 과정을 보는것과 치지로 피자를 만드는 체험과정 그리고 임실치즈를 판매하는데 체험은 초딩, 중딩에 맞는 정도의 프로그램이라고 한다. 여기도 코로나로 인해 문을 연곳이 하나도 없다. 서너군데를 가보았지만 문을 닫았다. 그중에서 가정집에서 판매와 펜션을 하는곳에 들러 이것저것 물어 보았는데 임실치즈는 전국의 모든 판매가가 같다고 한다. 그리고 치즈를 만들었던 신부님은 임실에 사신게 아니라 전주에 계시다가 임실에서 치즈 만드는법을 전수한 것이라고 한다. 물론 지금은 소천하셨다. 치즈 마을은 특별하지 않은게 특별한 것이다. 평범한 농촌 마을에 판매점이 있고, 체험장이 몇군데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 뿐이다. 마을 입구에는 농협인지 치즈조합인지 관공서가 운영하는 느낌이 있는 치즈관이 덩그러니 있을뿐이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실망한 곳이 바로 치즈마을이다. 치즈를 파시는 아줌마의 말씀이 어른이 오시기에는 볼게 없어요.
치즈마을을 나서니 컴컴하다. 이제 저녁도 잠자리도 봐야한다. 그래서 일단 읍내중심가이자 시장쪽으로 가서 검색을 하니 잘만한 곳은 없다. 그래서 여기서 저녁만 먹을 요량으로 식당을 찾았다. 낮에 느끼한 것을 먹었으니 매콤한 음식을 찾으려니 어렵다. 할수 없이 식당을 찾은곳이 그래도 상호에 옥이 붙은 현대옥이란곳이다. 난 전주콩나물 해장국을 집사람은 순대국을 시켰다. 먹어보니 시골의 맛집도 아니고 그냥 시장에 파는 싼 곳도 아니다. 짭고 맛없는 집이다. 그런데 왜 옥이란 상호를 가지고 장사를 하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한끼를 떼우고 편의점에서 내일 아침에 먹을 컵라면, 누룽지와 소주한병을 사서 길을 나섰다. 이곳보다는 좀 더 도시인 순창으로 가기로 하였다. 임실에서 순창까지 낮이라면 금방이라고 느꼈겠지만 밤이고 또 피곤한 상태에서 낯선곳이라 운전하는게 조금은 힘이 들었다. 순창에 도착하니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고 옥상에 모텔이나 호텔이 있는 곳을 찾고 인터넷을 검색하여 어찌 적당한 아니면 가까운 모텔에 들어가니 비좁다. 그래도 피곤하니 씻고 소주한병 얼른 마시고 나니 잠이 솔솔 온다. 시설이 남루하고 편안하지는 않지만 이방인의 신세는 그러한게 정상이지 않은가
아침에 컵라면을 끓이고 누룽지를 맛나게(?) 먹고 고추장단지마을로 갔다. 순창시내에서 가까운 곳이다. 마을 전체를 산기슭에 조성을 하고 주변에 대형 주차장을 만들고 한옥으로 만든 고추장 판매 전용마을이다. 도로가 있는 앞쪽과 비교적 뒤쪽도 마을 전체가 고추장, 장아찌, 간장을 파는 판매마을이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앞쪽에는 옹기를 전시하고 판매장이 있고 마당이 있는 기와집 마을이긴 하다. 차를 타고 뒤쪽으로 돌아보니 옹기는 간데 없고 드럼통 서너개가 족히 들어가는 커다란 플라스틱 통들이 즐비하다. 나도 음식에 약간은 생각과 지식이 있는데 이것은 진짜로 아니다. 눈속임이다. 발효음식을 저렇게나 커다란 플라스틱통에 담는다는 것은 발효를 시키는게 아니고 통에서 이것저것을 넣어서 섞는 용도일게 분명하다. 주택에서 혼합기 기계를 설치할수 없어 수동으로 배합하였을 것이다. 내 생각에는 조금씩 전통방식으로 만들어 발효시키고 시간을 더해 장을 파는게 낫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많이 들었다. 마을 옆으로 가니 농협과 장류를 만드는 대형 공장들이 몇군데 있다. 공장 옆으로 가니 발효시키는 동굴이 있다는데 공사중이라 안으로 가보지는 못했다. 발효동굴앞에 재미있는 전시물들이 있는데 기린, 토끼, 사슴 등 여러 가지 동물들과 그네 등이 있었는데 만든 재료가 각종 고추장통과 된장통 그리고 간장통이다. 크기와 색깔 모양이 각기 다른 통들로 만든 모형이라 잠시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고추장 마을도 많은 아쉬움이 있다. 아쉽다.
이제는 곡성이다. 섬진강가를 달리는 증기기관차를 타보고 싶어 곡성으로 향했다. 곡성의 기차마을에 도착하니 마을 입장료를 받는다. 뭐지 하는 기분으로 5천원의 입장요를 내니 2천원의 심청효도 상품권을 준다. 안으로 들어가니 미니 용인에버랜드이다. 장미정원과 각종 눈요기꺼리, 미니 어린이용 놀이시설이 있다. 몇군데를 슬슬 돌아보고 있는데 멀리서 방송에서 10시 30분에 기차가 출발한다기에 얼른 매표를 하니 1인당 왕복 9천원이란다. 다행히 기다리지 않고 기차를 타니 예전 완행이라는 기차와 비슷하게 꾸며 놓았다. 고정되어 있고 마주 보는 좌석이다. 그래도 천장에는 에어콘이 있다. 출발하고 조금 있으니 3량뿐인 기차에 예전 홍익회가 파는 이동차가 온다. 오징어, 추억의 쫀드기, 맥주, 땅콩, 사이다 등 예전 모습을 하고 있다. 추억삼아 쫀드기를 먹으면서 섬진강의 이름 유래와 심청이야기의 원조가 곡성이라는 근거없는 멘트와 섬진강 물고기잡이 이야기등을 들으며 천천히 가다보니 40분만에 종착역이다. 제법 운치있는 섬진강의 다리에서 바람도 쐬고 돌아오는데 옥수수를 파는 노점아줌마가 상품권도 받는단다. 좀전에 받았던 상품권으로 옥수수를 사서 돌아오는 기차에서 먹으니 정말로 맛난다. 내가 옥수수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이 옥수수가 맛있는건 분위기가 아니라 잘 삶았고 배가 고팠기 때문이리라. 계속 쳐다보아도 마음이 푸근한 섬진강을 아무 생각없이 바라보며 곡성역으로 왔다. 다보지 못한 기차마을 이곳저곳을 돌아보고 한 장 더 남은 상품권으로 음료를 사서 마시고는 마을 나서는데 이제 제법 관광객들이 들어온다. 내일이 어린이날이다. 곡성은 지역의 특성을 살려 섬진강과 증기기차, 기차마을이라고 명명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돈을 쓰게 하는 볼거리를 만들고 상품권을 주어 거기에 또 돈을 보태어 쓰게 만드는 요령을 터득한 것 같다. 이곳 군수나 담당자의 아이디어, 이를 수용한 리더의 안목에 감탄할 정도는 아니지만 전국 어디나 똑같은 축제와 먹거리 볼거리를 제공하는 타지역과 비교해 보면 나름 지역적 특성을 잘 살린 사례라 생각한다. 시골에서 넉넉한 재정도 없는 상태에서는 제법이다. 그래도 관람객의 수준을 생각하여 좀더 고민하기를 바란다. 서정이나 문학이 함께하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혼자 해 본다.
그리멀지 않은 곳에 승보사찰인 송광사가 있다. 말로만 듣고 가보지 못하여 꼭 가보고 싶어던 곳이다. 주차를 하고 천천히 걸으니 어느 절집이나 마찬가지이지만 계곡을 따라 울창한 나무사이로 걷는 맛, 이게 진정한 절집을 가는 맛이 아닐까? 집사람은 청암사랑 비슷하다고 하는데 청암사가 아니라 대부분의 절집가는 길이 비슷하다. 월정사도 법주사도 해인사도 다 그러하다. 생각보다 걷는길이 짧다. 조금 더 길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송광사의 절이야 승보사찰이니 절집이야 어떠한들 어떠리. 고승들이 느끼고 생각하고 고민하였던 게 무얼까 생각해 본다. 저 산과 나무들을 보고 어떤 생각들을 했을까. 이런 마음으로 절집은 훠이훠이 둘러보고는 나왔다. 다른 절집들과 마찬가지로 불사를 대형으로 하고 있다. 불사를 하는게 나쁜게 아니지만 왠지 자본주의의 겉옷을 입는 느낌이라 난 별로다. 내려오는 길에도 산책로는 참으로 맘에 든다. 고즈넉한 길에 급한 일 없는 여행객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평화롭다. 절 입구의 상가에서 산채비빔밥으로 늦은 점심을 해결하고 좀 쉬고 가자는 집사람의 말을 못들은 체하고 보성의 차밭으로 간다. 1시간쯤 걸리는 거리다.
주암호를 지나 보성 대한녹차밭으로 갔다. 1시간여가 넘는다. 가는길이 너무나 아름답다. 메타세퀘이아 길이 양쪽으로 얼마나 길고 긴지 모른다. 저런 가로수 길은 보존해야 하는데 하는 마음이 앞선다. 제발 손대지말고 보존하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 여기는 15여년전 친구가족과 같이 어린이날 즈음에 남도 답사를 할 때 들렀던 기억이 있다. 입구의 큰 삼나무와 능선을 따라 말타기하던 아이들의 등처럼 휘어진 차고랑이 아주 운치있는 광경이 처음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변함없이 입장료를 3천원 내고 들어서니 사람들이 많다. 코로나가 우습구나. 상상했던 녹차밭, 기억하고 있던 녹차밭이 눈앞에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무거운 발걸음을 내딛어 올라가 본다. 사진도 몇장 찍어 본다.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매점앞 의자에 앉아서 다들 먹는 녹차아이스크림 입에 물어본다. 이 모든게 상상하는 그리고 이해하는 맛 그리고 풍경이다. 단 한치의 벗어남이 없다. 내려오는길에 쭉쭉빵빵 늘어선 삼나무는 일본 냄새가 나고 대나무숲을 보니 대나무의 굵기가 예상을 넘어 두손으로 잡아도 잡히지 않는다. 우리 동네 뒷산에 있는 대나무는 왜 앙상할까. 상상과 머릿속의 이해만으로도 충분한 시공간이었다.
이제 순천으로 가야한다. 국가정원이 보고싶다. 보성에서 벌교로 가는길은 몇 년전 친구랑 갔던길이라 초행길의 두려움은 없다. 가는길에 벌교에서 약간은 이른 저녁을 먹었다. 벌교는 꼬막이니 꼬막정식과 양이 많으니 꼬막비빔밥으로 해결하였다. 감흥없는 맛과 서비스일 뿐이다. 벌교에서 꼬막정식을 안먹고 가면 나는 지난번에 먹어서 관계없지만 집사람은 누군가 묻거나 말할 때 벌교를 얘기할수 없는 이유로 들렀을 뿐이다. 순천으로 가서 잘 요량으로 천천히 가는데 이정표에 순천만 습지가 보인다. 아직 어둡지 않으므로 한번 가보기는 하자는 맘으로 도착하니 6시 50분이다. 방송에서 7시까지 매표를 한다니 서둘러 표를 샀다. 순천만 습지를 오늘보고 내일은 국가정원에 입장할수 있는 표인데 9천원이다. 노을진 순천만의 습지에서 선선한 바람과 아직은 키작은 갈대 그리고 갯벌에 쉼없이 들락거리는 게들의 움직임이 피곤해진 몸을 나른하게 한다. 천천히 습지 나무데크 전체를 걸으니 얼추 40분 이상이 걸린다. 노을과 신선한 바람과 적당한 온도와 편안한 맘이 행복감을 일으킨다. 이것이 진정한 행복이다. 더 바라면 욕심일 뿐이다. 다 돌고 나올려니 조명에 불이 들어온다. 시간이 좀더 있었더라면 하는 마음이 든다. 약간의 부족함이 긴 여운을 남기는 법이긴 하나 습지의 그 장면과 볼 옆을 스치는 바람의 촉감을 잊을수는 없을 것이다. 이제 숙소를 찾아가야 한다. 검색하여 전화 통화를 하였던 국가정원 옆 호텔에 가니 이곳은 호텔과 모텔이 즐비한 숙소촌이다. 국가정원의 동문과 불과 1길로미터 거리인 것은 아침에 일어나 알았다. 명색이 호텔이라고 조식이 있다니 다행이다. 편의점에 들러 소주한병과 안주를 사서 들어가니 호텔이라 방이 꽤나 넓어 큰 다행이다.
아침에 눈을 떠 조식을 먹으러 가니 호텔식이긴 하지만 미니 뷔페이다. 그래도 밥도 두종류이고 모닝빵도 샌드위치도 몇가지 반찬과 소세지도 있다. 그냥 배를 채웠다. 서둘러 나선다고 했지만 9시가 넘었다. 국가정원 동문으로 입장을 하니 바로 눈앞에 달팽이 모양의 언덕이 있다. 이게 바로 순천 국가정원의 상징물 아니던가. 각 나라의 정원과 예쁜 꽃들로 장식된 언덕의 연속이다. 다리를 건너 한국 정원에 가니 경북궁의 아미산, 뒷담, 담양의 소쇄원 등 우리나라 정원을 모방하였는데 건물은 모방할수 있으나 그 분위기는 어쩔수 없다. 아마도 지적재산권이 없어서 망정이지 원조를 모르는 사람이 보면 오해하기 십상이다. 이런건 흉내내느게 아니다. 미국정원에 자유의 여신상 축소물을 조성한다고 자유의 여신상 그 의미와 상징까지 함께 할수 없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이런건 카피하는게 아니다. 어제 많이 다닌 관계로 전부를 둘러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래도 두 번 오기 힘드니 다녀보고 싶은데 집사람의 체력이 거의 한계치인 듯 하다. 꼭 보고 싶은 곳 두어군데만 둘러보고는 나왔다.
이제 남해를 가야한다. 그것도 남해 미조항에 들러 지금이 제철인 멸치무침회를 먹어야 한다. 빨리 가야해서 남해 고속도로를 타고 하동에서 내려 남해대교와 바로 옆에 새로 생긴 이순신대교를 지나 한참을 가니 보리암 가는길이 보인다. 여기를 들릴까 말까 하는 사이에 흐려진 날씨처럼 그냥 지나쳐 버렸다. 남해에서는 미조항의 멸치와 보리암, 독일마을이 목표였는데 지나가 버렸다. 미조항에 도착하여 깨끗한 횟집에 들르니 이제 제법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가 귀에 쏙쏙 들어온다. 멸치 무침회와 매운탕을 주문하여 맛본다. 강한 양념으로 멸치회 맛을 알수는 없다. 그냥 부드럽다. 매운탕은 내가 끓여도 이것보다는 낫겠다. 늦은 점심으로 정말 허겁지겁 먹었다. 그냥 먹었다. 천천히 독일마을로 가는길이 너무나 아름답다. 해변길이 구불구불 드라이브에 제격이다. 시간이 되면 다랭이논 마을도 가보고 싶지만 방향이 반대방향이다. 독일마을에 들르니 주차할곳도 없고 차만 막힌다. 주차장 넓은 카페에 주차를 하고 달달한 차한잔을 들고 푹신한 소파가 있는 곳에 자리를 잡고 쿠션을 가슴에 안고 잠깐 눈을 붙였다. 너무 피곤하여 곤한 단잠을 잠깐이나마 잤다. 그 사이에 집사람은 마을을 구경하고 왔단다. 사람사는 마을이 아니라 독일음식 비슷한 것들을 파는 머나먼 남쪽 바닷가 독일식 집들이 있는 상가일 뿐이다. 맥주에 튀긴 족발인 학센은 제대로 먹어보고 싶다. 아마 이태원이 독일마을보다 낫지 않을까 생각하며 쓴 웃음을 지어본다.
잠시전 통화한 LH공사에 근무하는 고등학교 후배이자 노조위원장인 성진이와 저녁을 먹기로 약속하여 진주로 가야한다. 삼천포 토끼마을에서 잤었던 기억이 너무 좋아 갈까 하다가 진주로 갔다. 추억의 삼천포를 지나 진주로 가는데 체증이 심하다. 급할게 없는 나는 넉넉한 마을으로 성진이를 만나 후배가 사주는 맛난 소고기로 저녁을 해결하고 차한잔과 함께 넉넉하게 보냈다. 진양호에 잡아준 진주에서는 제일 좋은 호텔에서 1박을 할 수 있었다. 누가 보면 갑질하는 국회직원이라고 할수도 있겠다. 하여튼 성진이의 풀서비스를 받고 진주에서의 밤을 보낼수 있었다. 고맙네 채위원장. 호텔 조식이 이상하다. 양식과 한식이 있는데 국회 의원식당처럼 식판에 가져다 준다. 뷔페가 아니다. 양과 질 모두가 별로다. 명색이 진주에서 최고 호텔인데 그 말이 무색하다. 배를 채울 일이지 맛나게 먹는 것은 포기해야 한다. 순천의 이름만 호텔인 곳과 비교해도 한참을 모자란다. 짐을 챙겨 진주성으로 갔다. 책에서만 보고 배원던 김시민장군과 논개. 김시민의 진주대첩은 익히 알고 있고 그 활약상중에 인근 고을에서 왜군을 무찌른 얘기가 나온다. 내가 알고 있던 지례현 전투도 나온다. 진주에서 말을 달려 김천의 지례현까지 다녀간 전투를 말한다. 논개 얘기는 거의 구라일 가능성이 크다. 논개는 기생도 아니고 여염집 아낙이다. 또 함안에 무덤이 있다. 임란이후 고을의 사또가 논개 얘기를 각색하여 상소를 올리고 상을 내려야 할 사회적 이유가 있어 가상의 일이 현실이 되었다고 짐작할 뿐이다. 물론 내 생각도 근거도 없고 가상일 뿐이다. 진주성을 한바퀴 다 둘러보고 나니 여기가 왜 요충지였고 음식이 발달한 지방이고 서부 경남의 중요 도시인지 충분히 알수 있을 듯 하다. 입장료 2천원은 과하다 싶은 생각이 든다. 논개가 생각나는게 아니라 예전 구전 노래가 생각 난다. 진주난봉가. 울도 담도 없는 집에서~~~ 이렇게 시작하는 노래.
이번 여행의 또하나의 목적지중 하나인 의령으로 간다. 70년대 우순경 사건밖에 기억나지 않는 지역, 최근에는 메밀소바로 유명한 지역이다. 창녕방향으로 가다보니 조그만 시골 읍내가 보인다. 주차를 하고 원래 갈려던 식당은 문을 닫아서 아무런 의미없이 원조 메밀소바집에 갔는데 이집은 말이 원조이지 진짜 원조는 옆집이다. 화정소바가 원조이다. 세군데 식당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12시가 채 안되었지만 사람들은 제법이다. 물소바와 비빔소바에 만두를 시켰다. 면도 국물도 양념도 내가 아는 아니면 내 입맛에는 전혀 아니다. 그냥 달달하고 시큼한 자극적인 국수다. 그것도 삭카린처럼 진한 여운이 남는 단맛과 양조식초의 강한 신맛이 오래도록 남는 자극적이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맛이다. 이곳은 두 번 올곳이 아니다. 식당입구에 있는 방앗간에는 망개떡을 파는데 규모가 엄청나다. 왜 이 지역이 망개떡이 유명할까. 이 떡은 일본 찹쌀모치라 불리우는 떡이 상하지 않도록 망개잎에 싼것이고 망개는 우리나라 전역에 자생하는 평범한 풀도 아니고 나무도 아닌데.. 알수가 없다. 의령이 망개로 유명한 이유는 찾아봐야겠다. 의령이 고향인 호암 이병철의 생가가 읍내에서 그리멀지 않다. 여기도 코로나로 인해 솟을 대문은 굳게 닫혀 있다. 높은 담장이 집안을 구경이라도 하고 싶은 여행객을 애써 피한다. 마을 전체가 잘사는 양반마을이었던게 분명하다. 고래등같은 기와집들이 즐비하다. 솟을대문과 높은 담장이 인상적이다. 배산임수가 된 마을이지만 안산과 배산의 거리도 짧고 내의 크기가 자그마한게 풍수적으로 그닥 큰 부자가 나올 것 같지도 않은데 당대 최고의 부자가 났으니 내가 보는 풍수야 엉터리일 수밖에 없다. 휘휘 둘러보고 고모가 사시는 합천으로 향했다.
아버지 바로 밑의 동생인 고모는 올해 팔순이다. 살아오신 얘기야 말해 무엇하겠냐만은 그래도 결혼예물할 때 오고는 26년만에 들린다. 고모부 세상버렸을 때 와보지 못했다. 4촌들이 전부 내 또래라 어릴 때 같이 밥을 먹으면 대식가인 사촌들을 따라 밥을 배가 터지도록 먹고 고생했던 기억이 있다. 사촌동생이 비록 부유하지는 않지만 고모님 잘 모시고 열심히 잘 사는 모습에 위안을 삼는다. 얼마전 척추협착증 수술을 하고 그래도 이제는 다닐수 있게 되어 참으로 다행이다. 간만에 나란히 앉아 도란도란 1시간여 얘기를 하고 나섰다. 편안하고 안락한 여생을 보내시길 희망한다. 고령으로 와서 중부내륙을 타고 서울로 바로 올려다가 가는길이 김천을 지나는데 집사람이 들렀다 가자고 하길래 고향집에 잠깐 들러 어버이날을 앞두고 있어 인사들 드렸다. 지난 선거때 40일을 같이 지냈기에 별다른 감흥이나 생각은 없었다. 부모님이 긴 시간을 같이 지내다가 떠나서 많이 서운했다고 하신다. 중부내륙을 타고 죽 올라오니 동서울에 못미쳐 차가 많이 밀린다. 퇴계원에서 빠져 나와 하남에 있는 처형 카페에 들렀다. 김천에서 가지고 온 가죽에 야채 몇가지를 더하여 고추장 넣고 비벼 먹으니 나름대로 먹을만하다. 차량 정체가 풀리기를 기다려 9시경 출발하여 집에 도착하니 10시가 넘었다. 길고 긴 급하지도 않은데 쫓기듯이 여기저기를 황망히 돌아다닌 듯 하다. 언제 또 이런 여행을 할수 있을까.
준비해간 각종 조미료와 조리도구를 한번도 사용하지 못하고 왔다. 다음에는 천천히 주마간산이 아니라 체류형으로 머무는 여행을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