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2 23

명절 풍경

70년대 중후반 6남매를 두신 할아버지는 시집간 큰고모를 빼고 삼촌들과 고모 그리고 우리 3남매가 시골집에서 살고 있고 할아버지와 9살 차이나는 서울 종조부는 3형제와 함께 오셨고 17살 차이나는 대구 종조부는 1남 4녀인데 모두 모이면 30명 가까운 대가족이다 보통 명절 이틀전에 오셔서 명절을 쇠고 그 다음날 떠나는게 보통이었다 3박 4일을 지내는게 일상이었다 시골집은 방이 세개였는데 전부 잘수가 없어 몇명은 집안 대소가에서 자야할때도 있었다당시의 명절은 지금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음식을 준비하는 시간도 훨씬 오래전부터 준비하였고 음식의 종류도 아주 많았으며 양도 엄청 많이 하였다 명절 쇠러 온 가족들에게 일일이 싸주어야 했고 명절후 인사차 들리는 집안 사람들과 동네 어른들을 찾아 인사오는 사람들을..

카테고리 없음 2025.02.27

인생 최고의 변곡점

한의사였던 할아버지는 건강을 위해 항상 하시던 말씀이 있었다 밥은 꼭꼭 씹어 천천히 먹고 맵거나 짠 음식은 피해야 하며 뜨거운 음식도 먹지 말라고 하셨다 가마솥에 밥을 하면 할아버지 밥은 제일 먼저 퍼서 찬물에 띄워 밥을 식히는데 그릇도 우동그릇으로 뜨겁지 않은 그릇이었다 목욕할때는 타월로 때를 밀면 붕어의 비늘을 벗기는것과 같다면서 하지 말라고 하셨다 담배는 태우셨지만 술은 소주 한잔이 정량일 정도로 드시지는 못했다 중학교에 입학하니 키만 크고 삐적마른 내게 마당가에 철봉을 만들어 주시고 차오르기를 시범으로 보이시면서 운동을 해야 한다고 하셨다 이렇듯 별나다할 정도로 누구보다 건강을 챙기시던 할아버지는 유전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77년도 위암에 걸려 경대병원에서 위절제술을 하셨다 이후 위가 작아진 할아..

카테고리 없음 2025.02.27

과외담임선생님

내가 다닌 한일중학교는 기독교재단의 학교였다 한일이전의 교명이 시온중학교이니 다들 알수 있을 것이다 김천에는 남중은 5개 학교가 있고 여중은 3개 학교가 있다 우리 학교는 비교적 시내 한복판에 있는 학교였다 길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학교가 김천국민학교였고 이 자리는 조선시대의 역참이 있던 자리이니 김천의 중심가였다 학교운동장은 작다못해 대각선으로 50미터 정도되는 아주 작은 학교이다 100미터 달리기나 멀리던지기는 바로 앞에 있는 김천국민학교에 가서 해야 했다 축구라도 할려면 큰공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테니스공으로 축구를 하였으며 골대는 없고 농구골대의 기둥을 맞추는게 골이었을 정도로 작은 학교였다 교정이라고 해봐야 어디에서든 한눈에 다 볼수 있었다 지금은 교명이 석천중학교이다 자랑스런 선배는 90년대..

카테고리 없음 2025.02.25

인생공부

중학교 1학년이던 78년 서울 종조부께서 우리집에서 치질 수술을 하고 몇달간 계셨다 병원에서 수술한게 아니라 야매로 치질 시술을 하시고 요양차 계셨는데 마침 1학기 성적표를 보시고 커서 서울대에 입학하면 등록금을 비롯해서 전부 지원해 주겠다고 하셨다 그해 여름에 난 대구의 유신학원에서 영어와 수학을 배우기 위해 단기반에 등록하고 학원을 다녔다 대현동에서 살고 있던 외삼촌과 꼭지 이모 그리고 모친의 사촌인 춘호외당숙과 경애 종이모가 사는 집에서 한달간 살게 되었다 버스가 다니는 큰길에서 산을 오르듯이 올라가면 산꼭대기 즈음 달동네에 있는 집이었다 외삼촌은 고등학생이었고 막내이모는 풍국면 공장에 다니고 있었고 춘호외당숙은 한의대를 가기위해 재수중이었다 큰길로 나와 2번 버스를 타면 신도극장 칠성시장을 지나 ..

카테고리 없음 2025.02.25

추억맛집 외가

도시와 농촌을 불문하고 어디에서 자랐든 누구에게나 외가집은 설레는 단어이고 추억맛집이다나의 외가는 상주시 화동면이다 김천에서 어모를 지나 여남재를 넘어 옥산 청리를 거쳐 상주시내에서 다시 오십리를 가야하는 상주에서도 산골이다 이길이 아니면 추풍령을 지나 황간에서 모서 모동을 지나 화동으로 가는 길이다 화동을 지나면 화서이고 여긴 충북 보은 옥천과 맞닿은 오지이다 김천에서 황간까지 1시간 황간에서 화동까지 1시간여 비포장 도로로 털털거리는 버스를 타야 갈수 있는 먼곳이었다화동장터에서 버스를 내려 상주방향으로 조금 걷다보면 화동국민학교 화동중학교를 지나고 신작로를 벗어나 왼쪽 오솔길로 가면 또랑둑길을 걷다가 다시 신작로를 만나 걸으면 길가에 말무덤이 있고 멀리 왼쪽산에는 탄광이 보인다 중간에 마을 한복판을 ..

카테고리 없음 2025.02.24

꿈의 기원

내가 졸업한 개령서부국민학교는 김천에서 선산으로 가다가 유한킴벌리 공장이 보이는 곳에서 좌회전하여 들어가면 신룡리에 위치한 학교이다 개령면의 서쪽 지역인 대광동 황계동 덕촌동 신룡동과 어모면의 다남1리와 4리의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이다 해방이후 개교하여 내가 졸업할때가 30회가 되지 않는 학교이며 한 학년이 두반인 전교생이 700명쯤 되었다 교가에 700건아라는 기억이 있다 당시 국민학교가 모두 그러하듯이 교실바닥에 초칠도 하고 거위도 키웠으며 송충이도 잡고 쥐꼬리도 숙제로 냈고 난로위에 도시락도 있고 도시락 혼분식 검사도 하는 시골의 평범한 학교였다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5, 6학년을 학생도 바뀌지 않았고 담임 선생님도 그대로인 상태로 2년간을 지내게 되었다 우리 담임 선생님은 한재수 선생님이셨다 다..

카테고리 없음 2025.02.24

음밖의 남자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대체로 음치이거나 예술적 재능은 부족하게 태어났다 그래도 조부는 단오날이 되면 동네 느티나무 옆에서 그네를 타고 놀적에 장구를 메고 가락을 타신 기억이 있기는 하다 또 외삼촌도 노래를 곧잘하고 노래방도 좋아한다 누나는 교대 면접시험에서 음계를 잘 따라 부르지 못해 애국가까지 불렀다고 한다 나에게는 노래와 관련된 수많은 에피소드와 부끄러운 순간들이 있지만 대표적인 장면이 세번 있었다 이 장면들은 나의 인생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주홍글씨가 되었다국민학교 4학년 담임이던 황시영 선생님은 학교 전체의 브라스밴드의 지도교사이셨다 가끔은 학급 음악 시간에도 학교 브라스밴드처럼 큰북 작은북 실로폰 트라이 앵글 캐스터 네츠 피리 등으로 합주를 하였는데 키가 큰 나는 큰 북을 쳤다 처음 몇박자는..

카테고리 없음 2025.02.23

나의 가승

증조부는 큰집에서 분가하면서 지금 사는 집터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여 나까지 그곳에서 태어나 우리집의 뿌리가 되었다 이제 집안의 짧은 가계를 알아보자 내 자식들인 현성이와 현재는 서울당숙 아들들인 민영 대영의 아이들과는 8촌간이다 한마당에서 8촌 난다는 말이 실감되는 놀라운 현실이다증조부모는 3남1녀를 두셨고 증조부는 장이 약하셨고 위암으로 돌아가셨다 증조모는 좋은 지능을 주셨다 할아버지 형제들 모두 보통이상의 지능을 타고 나셨음은 분명하다 할아버지가 장남이시다 할머니는 구미 송정에서 시집오셨다 17살에 결혼하여 4남 2녀를 두었다 할아버지는 80년 3월에 위암으로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뇌출혈과 그 합병증으로 90년 한여름에 돌아가셨다 조부의 지능은 좋고 뛰어났다 하지만 날카롭고 화많고 성격급하고 참지 ..

카테고리 없음 2025.02.22

고모의 선물

신작로에서 언덕이랄것도 아닌 약간의 오르막을 동네사람들은 길건너 마을 이름을 붙여 독술고개라 불렀다 독술고개를 지나 산모퉁이를 돌면 70년대 새마을 운동으로 지어진 마을창고가 있다 창고옆에는 마을 느티나무가 있는데 대략 수명이 200년은 넘은듯 하다 느타나무 옆에는 둘레가 3백미터쯤 되는 인공저수지가 있는데 1930년대쯤 판 저수지라 한다 어린시절 이 저수지에는 물이 깨끗하여 민물새우도 잡았다 7살즈음 민물새우를 잡아 산에서 새우탕을 끓여 먹던 둘째 삼촌을 따라가서 막걸리 한모금을 얻어먹고 비틀거렸는데 삼촌은 할아버지께 혼이 난 것으로 기억한다 70년대 하이타이를 비롯한 세제를 쓰면서 저수지에는 더이상 새우가 살지 않았다 저수지 아래쪽은 넓지도 적지도 않은 동네밑 들판이 있다 들판 건너 산아래 마을은 우..

카테고리 없음 2025.02.22

회초리의 폭력성

어린시절 할아버지는 집안의 절대자 이셨다 내가 중학교 3학년이던 80년 3월에 돌아가셨으니 그때까지 나의 정신적 지주이고 집안의 가장이신 할아버지는 부모님과는 비교할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이셨다 특히 나는 장손이라 특별한 지위와 관심을 받고 자랐다 누나와 남동생과는 차원이 다른 특별한 존재로 성장하였다아랫채의 방에서 조부모님과 함께 잠을 잤으며 식사도 다른 식구들이 모두 안방에서 모여 밥을 먹을때 난 할아버지 할머니와 셋이서 따로 먹었다 이말은 항상 좋은 쌀밥과 반찬을 먹었다는 얘기이다 보리쌀이 조금이라도 덜 섞인 밥과 고등어라도 구웠다면 맛난 가운뎃 부분이 상에 올라있고 난 언제든 맛나게 먹을수 있는 특권이 있었다 때에 따라 티브이 상자 서랍속에 있던 커다랗고 하얀 눈깔사탕도 먹는 특권이 있었다 대소가 ..

카테고리 없음 2025.02.21